brunch

심장 초음파

잿빛 복도에 서서

by 포레스임

여행을 다녀오고 곤하게 잠을 청하는 순간 아랫배가 이상하게 아파왔다.

그동안 살아오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통증에 기분이 불쾌했지만, 곧 낫겠거니 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통증은 폐부를 찌르듯 더해오고 더럭 겁이 나서 아내를 불렀다.

근처의 대학병원으로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맹장염이 떠올랐다.

'흔히들 이런 걸 맹장염이라 하는구나' 하고 애써 자위하며, 짐짓 도착하기 전까지 나름의 진단을 내리고 평온히 생각하려 애를 썼다.

병원의 응급실에 누워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여자의사가 다가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병명을 알려주었다.

신장경색? 콩팥의 혈관을 혈전이 막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해주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입원을 해야 한다며 병원직원은 아내에게 서류를 작성해 달라고 하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행히 별다른 수술 없이 약물과 주사제로 일주일의 입원기간 동안 치료를 하던 중, 마지막 날 담당의사는 심장내과에 가보라 한다.


심장내과에서의 기다림은 초조하였다.

의사는 내게 심장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판막이 원활히 개폐를 못해서 혈전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내려친 듯 눈앞이 아득했다.

병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오지 않았다.

직장의 동료들과 산행을 할 때면 유난히 쳐지면서 가쁜 숨을 쉬는 것도 그 때문인가 싶었다.

젊은 시절 동원훈련소집에 훈련을 받던 중 식은땀에 힘들어져, 군의관을 찾았을 때 심장빈맥 진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조기퇴소하고 병원을 찾아 늑막염 수술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모든 것이 스펙트럼의 환영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일단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나이 먹은 심장병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좀 더 큰 규모의 메이저 병원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곳은 뭔가 다른 치료로 나를 낫게 해 주리라, 기대를 품고서....

주변의 직장동료들이 하나둘씩 당뇨나 혈압 등으로 병원을 다니는 일들이 생각났다.

나만큼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자신했었다. 나 역시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듯 병원순례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병원을 옮겼다.

역시 메이저 병원은 규모부터 달랐다.

처음 두 달 동안은 이런저런 추가 검사와 시술을 외래로 하였다.

직장에 출퇴근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는 나에게 결국 수술을 권했다.

혈압이나 맥박이 극히 정상이고, 현재는 문제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직장에 병가를 내고 주변을 정리 한 뒤 다시 입원을 하였다.


2인 병실을 잡았다.

같이 지내게 된 환자는 칠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으로 목사분으로 보였다.

문병 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몇 가지 수술을 하였는지 몸에는 이런저런 튜브가 기계장치에 어지러이 달리고, 소변 줄로 보이는 튜브에는 바닥의 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분의 간병인 아주머니와 아내는 무언가 서로 통하는 듯, 몇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병원은 하나의 세계와도 같았다.

없는 것이 없었고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동안, 그 규모에 새삼 감탄하였다.


세련된 복장의 간호사와 의사들은 바쁘게 이리저리로 다니고 있었고, 환자들은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초조한 눈빛이 역력하다.

문득 괜히 병원을 옮겼구나 하는 자괴감에 나 자신을 책망하고 싶었다.

누구 하나 나한테는 관심조차 없는 듯싶게, 거대한 규모의 이놈의 병원은 메커니즘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원을 빠져나가는 시간이면 퇴근시간인 듯했다.

나 또한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이리저리 인도하는 간호사에 이끌리며 검사를 받고 수술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입원하셨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같은 병실에 있으면서도 이틀 동안 얘기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이리저리 검사라는 명목으로 끌려 다녔던 탓에 처음으로 수인사를 하게 된 병실에는 아내도 간병인 아주머니도 없는 시간, 호젓하게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래가 들끓는 갸릉거리는 기침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간호사, 그리고 떼로 몰려오는 문병객들의 기도소리에 병실운도 지지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침대커튼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같은 병실의 노인의 얼굴도 처음 보았다.

노인은 간신히 튜브를 통해 생의 마지막을 연명하는 듯 무슨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간헐적으로 들리는 신호음이 귀에 거슬렸다.

심장판막증으로 수술을 하게 됐다고 말하니 자기 또한 그 수술을 하였고, 더불어 폐 수술도 하여 이지경이라고 했다.

취침시간에 무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의 체크시간이 많아 미안하다고 한다.

“별말씀을 빨리 쾌차하셔야죠!” 답례로 한마디 하였다.

노인은 “미안해요! 내상태가 이래서 간호사들이 반 시진 간격으로 들어오니 잠도 설쳤겠구먼!” 온화한 음성이었다.

선뜻 대꾸할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 잠자코 있자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화였어도, 혼자 품었던 불만의 감정이 녹고 있었다.

다음날 간호사는 치과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건물들 사이의 지하통로와 구름다리를 지나 승강기를 타고 오르고 나니, 치과대학병원의 진료실이 나타났다.

수술용 마우스피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참을 치아상태의 점검을 받고 윗니, 아랫니의 본을 떴다.

아내가 비죽이 웃으면서 눈가에 이슬을 어른거리며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결혼 이십여 년 동안별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내이기에, 나는 와락 겁부터 났다.

얼마나 힘든 수술이기에 마우스피스까지 만들어 끼어야 할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수습하느라 병실로 오는 내내 휠체어에 앉아 눈을 감았다.

병실의 노인은 의료진에 에워싸여 볼 수 없었다.

뭔가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

마침 직장동료들이 떼거리로 병문안을 왔다.

휴게실에서 짐짓 괜찮은 듯 농담도 하며, 애써 다른 기분을 느껴보려 나를 달래 보았다.

며칠 동안 나를 간병하느라 병실 침대 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아내가 측은했다.

아직 수술한 것도 아니니 딸아이도 챙길 겸, 집에 가서 자라고 보냈다.

노인분의 간병인 아줌마도 주말이어서인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는다.

늦은 오후 저녁식판을 물리고 문득 건너편의 식판을 보니 손도 대지 않은 듯했다.

“어르신! 몇 술이라도 뜨시고 주무셔야죠!” 희미하게 눈을 떠서 나를 보던 노인은, 침대 모서리를 짚고 있는 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편하게 생각하우. 겪고 나면 다 한 때, 지나갈 일이지”두어마디 밖에 안 되는 노인의 음성은 나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의 다른 한 손이 와락 노인의 손위로 겹쳐졌다. 서로의 온기가 심장으로 전해져 왔다.

병원건물입구의 심장혈관센터라는 네온간판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 이제야 바보같이 알아차렸다.

서로의 겹쳐진 손은 온기를 내고, 혈관을 타고 올라 서로의 심장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노인의 손은 희미한 온기로 나를 곁부축하고 심장의 판막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낮에 교인들이 문병을 와 놓고 간 성경구절의 기도문이 팜플랫에 새겨져 노인의 머리맡에 있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노인의 손은 돌아가시고 지금은 없는 아버지의 식어가던 희미한 잔상의 온기처럼 애달팠다.

한 때는 이글대는 잉걸불처럼 열변을 토했을 노인의 음성은 잔불처럼 사그라지고 있었지만, 혼란과 두려움의 나를 위무하기에 충분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주말이 넘어가는데, 수술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아내와 병원인근 산책을 하였다.

삼월초의 날씨는 한낮에도 꽃샘추위를 떨치지 못했는지, 가로수의 움을 틔우기에는 역부족해 보였다.

서점에 들러 병실에서 읽을 작은 시집 한 권을 사고, 가락국수전문 식당에 들어가 아내가 좋아하는 유부우동을 시켜주니 배시시 웃는다.

후루룩 거리며 삼키는 우동가락 목 넘김이 생동감 있어 좋았다.

병실로 돌아오니 노인의 간병인 아주머니는 침대의 시트커버를 벗겨내고 있었다.

“목사님은 검사받으러 가셨나요?”

아주머닌 침울하게 “좀 전에 의사, 간호사가 아들과 들어와 중환자실로 모셔갔어요! 오늘 넘기기가 힘드신가 봐요!”

마음이 안 좋다며 아내와 두런두런 얘기를 하는 중에, 나는 병실을 나와서 3층의 중환자실로 내려왔다.

저녁마다 오던 노인의 아들이 보이고, 밝은 잿빛의 복도가 오늘따라 우중충해 보이는 건, 흐린 날씨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한쪽 벽면의 의자에 걸터앉아 조여 오는 불안감을 삼키고 있었다.

한참 후,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자 노인의 아들이 흐느끼며 걸어 나오고, 덮인 이동식 침대는 마스크를 쓴 남자간호사들에게 이끌려 나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는 처연히 병실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건너편 노인이 쓰던 침대는 말끔히 치워져 다음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의 병원은 환자를 깍듯이 고객이라 불러준다.

환자라는 말보다 고객이란 용어가 더 높임말일까?


휴일 회진하는 레지던트로부터 몇 가지 얻어 들었다.

나를 협진하던 의사들의 진단이 달라 수술이 늦어진다고 했다.

외과의사 들은 수술을 하자는 쪽이고, 내과의들은 시술을 통해 좀 더 경과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했다.

혈전의 위험은 혈액용해제를 먹으면 될 일이고, 혈압과 맥박이 극히 정상이니 의사들의 의견이 나뉜듯했다.

나는 수술을 하지 않고 퇴원하기로 했다.

선천적으로 심장판막에 이상이 있었음은 분명하고, 수술을 하든 안 하든 약은 평생 먹어야 한다고 했다.

세월의 적층이 내 몸에도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생활방식과 식이요법 그리고 운동을 결심해 거대한 회랑의 잿빛복도를 빠져나와 나의 영역으로 돌아가, 일상으로 복귀한 지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퇴원할 때의 결심이 무뎌지기도 하지만 늘 다짐하곤 한다.

‘내 너를 굳세게 하리라’라고 내 몸에 되뇐다.

한때 지나간 입원의 경험은 삶과 죽음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의 자양분으로 남겨지리라는 것을 늘 명심하고자 한다.

좀 더 가벼운 기분으로 남은 생을 즐기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keyword
이전 08화평온당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