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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행(江華紀行)

아버지의 바다

by 포레스임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옷깃을 여미게 한다. 더구나 섬날씨는 유난히 바람이 잦다.

초지대교로 접어들어 인삼을 사자는 아내의 말에 공판장을 찾았다. 매장 안은 흔히 보는 인삼시장보다 새 건물 냄새부터 달랐다. 늘어놓은 삼이 유난히 싱싱해 보이고, 제법 약효가 있을 듯했다.


아내는 무슨 장을 보든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늘 그렇듯 차로 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교 끝 바로 옆, 인삼공판장은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썰물 때인지 갯벌이 드러난 바다는 탁한 물길이 어지러이 흐르고 있었다.

가까운 곳의 갯벌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게 한 마리가 힘겹게 옆 걸음질을 하고 있다. 강화바다를 본지가 한참 전이라 생경하게 보이기도 한다.



광성보와 손돌목 물길이 멀지 않은 곳이라, 탁류가 어지러이 흐르고 있었다.

강화읍까지는 아직 더 올라가야 한다.

아내를 채근하여 서둘러 끝내게 하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풍광도 좋고 여유 있게 갈 수 있다.

비가 올 것도 아닌데 날씨가 우중충하다. 용담돈대를 지나갈 때는 탁류의 바다와 하늘이 묘하게 어울린다.


강화대교가 보이니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6.25 때 아버지는 헤엄을 쳐, 강도 아닌 이 바닷길을 건너오셨다고 했다. 서울에 일이 생겨 방문했다가, 동란이 터지자 급하게 강화로 들어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나룻배는 다 없어지고, 중학생 때였는데 수영에는 자신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강화대교를 건널 때면 그 말씀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강화에서 이름난 수재였다.

강화의 실업계고 출신으로 지금의 SKY대학 중 한 곳에 합격하셨다고 한다. 읍내엔 현수막이 내걸리고 할아버지께선, 보이는 지인들은 모두 취하게 만들었다고 들었다.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학업을 마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제직공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한껏 흥이 올라 서울출입이 잦더니, 결국 사업을 접어야 하는 형국이 됐다고 한다.


지금의 ○○통운에 야간 경비원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청소일을 하시던 외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 학년을 끝내고자 하셨으나, 어머니와의 결혼을 늦출 수 없어 못내 발길을 돌리셨다고 한다.

이미 내가 모태 속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으리라 생각이 된다.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는 아버지를 더 이상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강화읍내에서 멀지 않은 하도리에 모셨다.

여기까지 와서 아버지묘소를 지나칠 순 없었다. 간단한 성묘를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술 한 병과 약과, 쥐포 등, 사놓고 봉지 안을 들여다본다.

결국 우리 좋아하는 것만 산 꼴이다. 가는 도중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덩이들이 보인다.

아직 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 추석에 벌초를 숙부님들과 하고선, 여름 태풍에 반쯤 부러진 소나무를 치우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둥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해를 넘겨 아직 겨울이니, 바짝 마른나무 둥치쯤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힘을 주어 넘겨본다. 푸석거리는 소리에 맥없이 넘어간다.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미뤄놓은 숙제를 마친 것 같이 홀가분했다. 그 사이 아내는 아까 사 온 것들을 차려놓고 약과를 우물거리며 손뼉을 친다. 술을 한잔 따르고 아버지께 적셔드렸다.


졸업을 못한 아버지는 선택의 폭이 없으셨던 것 같다. 화학전공을 하셔서인지 중소 화공회사를 다니셨다. 그나마 같은 직원끼리의 화합이 좀 안되셨던 것 같다. 대학 때, 무술운동도 하시고 학생운동에도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셨다던, 아버지는 정작 생활전선에서는 낙제점이셨다. 회사에서 동료와 다투시고는 과감하게 사표를 내셨다고 한다.


내가 초등 2학년이 될 때까지 짧고 굵게, 아버지의 회사원 생활은 이어지지 않았다.

인천 해운국에 어선 계도원으로 계실 적이, 그래도 가장 평화로웠다. 조부모님 댁에서 잠시 살림을 합칠 때, 생활은 어린 나에게도 불안하였다.

아버진 어머니와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편의점이라고 하지만, 서울 변두리 동네 모퉁이에서 경험도 없는 가게 운영이 녹녹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구멍가게 일로 아버지와 종종 다투셨다.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아버지의 자존감은 점점 깎여 흩날렸다. 내가 이런저런 직업을 젊은 날 전전하다가, 미관말직이나마 지금까지 하는 건 아버지 영향이 크다.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어"

아내의 목소리에 떠밀려 일어섰다. 추우니 그만 가자고 성화다. 그리 높은 지대도 아니지만 내려오는 길이 조심스러웠다.


군청을 지날 때쯤, 문득 할머니 동생분인 작은할머니 생각이 났다. 군청 근처 시장에서 포목점 운영을 하셨는데,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자매분을 7공주파라고 불렀단다. 할머니가 제일 맏이시고 동생분들과도 가까이 지내니, 어릴 때 혹간 뵙던 분이라 안부라도 전하고 싶어 진다. 너무 먼 인척이니 돌아가셨어도, 연락은 없을 것이다.


강화는 이제 섬이라고 하기도 뭐 하다. 두 곳의 대교가 수도권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입하여 주말이면 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긴 서울이나 인천에서 접근성이 좋으니 당연지사다.

내가 어릴 적에 시외버스로 굽이굽이 가던 길이 깔끔하게 직선화되었다. 빨리 갈 수 있고 접근성이 좋다는 건 편리하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억도 그만큼 파묻힌다.


강화대교를 지나기 전, 다리 옆에 붙은 전통시장을 한 번만 보고 가잔다.

짜증이 조금 나지만 문득 갯벌의 찐득한 바다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닦인 주차장 바로 옆, 물이 흐른다. 작은 소용돌이가 여러 개 보이고 갯벌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뭇 생명들에게 환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망둥어는 이리저리 펄떡이고, 갯벌의 게들은 더 이상 구멍으로 숨어 들어가지 않았다. 물이 오르면 어디든 간다는 준비를 하는 것일까? 앞 발 양쪽을 쩍 벌리고 다른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바다는 여전히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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