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가게를 또 시작한다. 이번엔 만화가게다. TV도 들여놓는다고 한다. 맨날 돈 좀 생기면 만화가게 가기 바빴는데, 안 그래도 된다. 근..... 데 아버지는 왜? 취직은 안 하고 가게만 하시는지 모르겠다. 대학교도 좋은데 다니셨는데...., 어른들 하는 일은 잘 모르겠다.
아버지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간다. 창신동 어디에 만화책 도매상이 있다고 하셨다. 청량리시장 어딘가에서 버스가 무지하게 큰 대학교 앞을 지나간다.
지난번 가게 할 때 아버지와 청량리 경동시장을 와봐서 조금 안다.
아버진 물끄러미 그 대학교를 살피신다. 아마도 여기를 다니셨나 보다. 창신동 만화 도매상은 어마어마하게 만화책이 많았다. 아버지와 나는 책방 주인이 싸준 책 꾸러미를 들고 새로 여는 만화방으로 왔다.
근데......, 우리 집이 만화가게를 하는 것이 썩 즐겁진 않다. 우리 반 녀석들이 혹시 오면.....? 가능하면 아버지 도시락만 건네고 가지 않아야지...., 생각한다.
호야가 1학년으로 입학했다. 내가 4학년이 됐는데, 이제 1학년이다. 그래도 내가 챙겨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이 오전 밖에 안 되는 호야는 내가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에 교실 창 너머 호야가 철봉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같은 1학년은 조무래기들이어서 그런 것 같다. 끝나면 호야에게 달려가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다.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기도 하고....., 그런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겐 놀림감이 되었다.
"1학년 하고 노니, 선생님 된 거냐?"
"그리고 걔 냄새도 나던데, 친구냐?"
이것들이 약을 바짝 올린다. 키도 쪼끄만 것들이......, 둘이 나를 '멀때'라고 놀린 것도 한 몫했다. 방과 후, 그 한 놈에게 신발주머니를 던졌다. 머리통에 정확히 맞았다. 같이 놀리던 놈이 나에게 먼저 덤빈다.
호야가 어느새 따라와 말린다. 학교 앞 다리밑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태권도장을 다녔던 실력발휘를 해 볼 참이다. 둘이 와락 나를 껴안듯이 덤볐다. '어! 이게 아닌데? 그럼 발차기를 할 수 없는데..., ' 순식간에 내가 밑에 깔렸다.
한 놈이 나를 타고 주먹을 날린다. 코피가 났다. 그러다 호야가 그놈을 발길질로 치니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한 놈은 코피를 나게 해 줬다. '멀때'가 아닌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지나던 6학년 형이 우리를 말리고 집에 빨리가라고 호통을 친다. 나는 손바닥으로 코피를 쓱 닦고 호야와 갔다. 역시 호야는 내편이다. 집에 오니 엄마가 옷이 흙깡태기가 된 나를 멈칫 세운다.
"뭐 하고 놀았길래 옷이 이모양이냐?"
"얼래! 너 코피도?...., 누구와 싸웠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내 말을 듣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같은 반 애들하고 싸우면 안 돼!......, 그리고 호야하고 그만 놀아!...., 걔는 1학년이야 너는 4학년이고 동네에서만 가끔 만나고 학교에서는 모른 체 해!"
다음날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다.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간다.
"너 이 녀석! 학교앞 다리 밑에서 결투를 하셨다메! 그리고 너보다 조그만 애들을 그렇게 때리면 어쩌냐?"
이것들이 선생님께 고자질한 거 같다.
"선생님! 걔들이 먼저 저를 코피 나도록 때려서....., 그랬어요"
"너! 그 두 녀석 머리를 지나가며 계속 툭툭 건드렸다며!....., 걔들도 네가 그러니 놀리는 거야!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알아들어!"........ "네...., "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비는 내가 먼저 걸었던 것이다. 선생님 말대로 그 애들에게 가서 손을 내밀고 사과를 했다. 짜식들도 사이좋게 지내자고 했다.
운동장 철봉대를 보니 또 호야가 있다. 달려가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라고 했다. 나중에 동네에서 보자고 했다.
"우리 집에 와서 숙제 좀 도와줘!"
"내 숙제도 해야 한단 말이야!!...., 네가 알아서 해!!"
호야가 좀 놀란 눈치다. 근데 어쩔 수 없었다. 언제까지 1학년 숙제를 내가 해줄 순 없었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호야는 집으로 갔다.
방과 후, 집으로 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겁다. 집에 오니 엄마는 아버지 만화가게에 도시락 좀 드리고 오라신다. 가보니, 여느 만화가게처럼 진열이 근사했다.
"밥 먹을 동안 만화책 꺼내서 봐!!"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드시는 아버지가 괜히 싫었다. 만화가게도 싫고, 그냥 다 싫었다. 혹시 모를 우리 반 애들이 여기 올까 봐 싫었다. 건성으로 만화책을 뒤적이다가 빈통의 도시락을 들고 후다닥 뛰었다.
오는 길에 호야가 궁금해졌다. 암만해도 내가 너무했다 싶었다. 느티나무 아래 호야네 집으로 간다. 낯선 아저씨와 호야가 같이 있었다. 호야는 근사한 방패연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멋진 실패를 옆에 두고 있었다.
"네가 호야 친구로구나!...., 아저씬 앞으로 호야와 같이 살 거다!!"
뜬금없이 호야와 산단다. 내 머리통을 쓰다듬다 호야에게 뭔가를 주고는 가셨다.
"왜 왔어! 혼자 하라메"
"아깐... 미안했어! 그럴 일이 있었어!"
호야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손을 잡아끈다. 헉헉 대며 산 중턱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냥 산에 오르는 동안 진달래며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좋았다. 숨이 턱까지 차 오르자 우린 너른 바위하나를 찾아 걸터앉았다. 호야가 입을 열었다.
"우린 양주로 이사 간다!...., 엄마가 아까 그 아저씨한테 시집가나 봐!......, 난 가고 싶지 않은데, 엄.... 마가 가...... 재"
"양... 주가 어디쯤이야?"
"여기서 한참 위로 올라간대! 거긴 서울도 아닌 시골이래! 학교도 그리 전학 가야 한다는 걸...."
"이젠 못...... 보겠다!"
"우리 내려가서 연 날리자! 아까 그 아저씨가 연 사주고, 이백 원이나 줬다!"
호야와 나는 내려와 연을 들고 들녘을 뛰어다녔다.
바람이 없는 들녘을 내가 연을 띄우면 호야가 부리나케 달려, 연을 하늘로 올리려 했지만 바람이 없었다. 몇 번을 해봤지만 똑같았다. 거친 숨만 올라왔다.
"너네 만화가게 한다며, 거기 가자!!"
"안돼!!!...... 싫어!! 갔던 데로 가자!!"
호야의 돈을 받는 아버지를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다리 윗동네 만화방을 갔다. 떡볶이도 사주는데 맛이 없었다. 집으로 오는데, 날이 저물어 갔다.
엄마와 할머니가 말씀을 하고 계셨다.
"아들내미 하나 있어도 다행이지 뭐니!... 맹해도 참해 보이니 사내복이 있나 보다!!"
"그러게요! 양주에서 건재상 한대요! 그렇게 고생만 하더니 뭔 복인지 몰라!!"
호야 엄마 얘기 같았다. 국밥집 할머니가 중매를 서 아까 그 아저씨한테 시집을 간다고 한다. 호야는 새아버지가 생기나 보다. 근데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칡소 조카님은 뭐가 그리 바쁘셔..... 이제야 얼굴 좀 보네.... 들어가서 센베과자 먹어!!"
막내고모가 일찍 들어오셨다. 늘 느지막이 들어왔는데 오늘은 일찍도 퇴근하셨다. 방으로 들어가니 동생이 막냇동생을 어르며 센베를 먹고 있었다.
"오빠! 숙제는 했어?"
"이제 할 거다 뭐!"
"작작 좀 돌아다니고 숙제 부터해! 4학년이나 돼서 그래야 쓰겠어!!"
이것이 할머니 흉내를 내면서 놀린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메롱 거리 고는 밖으로 나간다. 막내는 아직 버둥거리는 돌배기다. 버버거리 기는 하지만 눈매가 똘망똘망하다.
일주일 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퉁이에 호야가 있었다. 오늘 이사를 간단다. 말없이 호야네 집으로 갔다. 트럭이 한대 서있고 짐을 거의 다 실은 모양이다.
"호야! 빨리 타라! 친구 보고 오느라 늦었구나!"
지난번 그 아저씨다. 호야 엄마는 먼저 가서 짐정리 한다고 했다. 호야가 트럭 앞자리 가운데 앉고 시동이 걸린다. 집안을 마지막으로 보겠다고 호야가 다시 내렸다. 그러더니 지난번 그 연과 실패를 나에게 준다. 그리고 다시 오른다. 흙먼지가 뿌옇게 오르더니 트럭이 멀어져 간다.
나는 호야가 준 연을 날리고 싶어졌다. 모처럼 바람도 분다. 짧게 쥔 연실을 조금씩 풀어 봤다. 두둥실 연이 올라간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제법이다. 호야가 탄 트럭까지 닿을 듯이 연실을 풀었다. 네모난 방패연이 아득히 보일 정도로 띄웠다. 멀리 트럭에서 호야가 손을 흔든다. 연을 본 모양이다. 연이 높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