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길이 포근했다. 일부러 차를 놓고 버스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봄날로 넘어가는 가녀린 겨울 날씨였다. 한겨울이 아직 멀었는데 넘어가는 오후 햇볕이 아직 남아있고 양길 옆의 메타세쿼이아가 앙상한 팔을 하늘로 우러르는 겨울인데도 조화를 파는 꽃가게 점원들이 꽃다발을 흔들어 대니, 봄인 듯 착각이 들 정도로 흡사 환영인파가 나온 듯 혼동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가신 길은 이처럼 화사했을까?
가신 지 벌써 오 년의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오롯이 남아 그날의 하루가 아득히 추억된다. 도시 한가운데 이름도 '가족공원'이라는 호칭을 쓰니, 언뜻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로 여겨지지만, 언제부터인가 '장묘공원 사업소'란 명칭이 좀 더 친근히 여겨지도록 가족공원으로 바뀌었다. 복잡한 버스노선을 따라 문득 멈춰 선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면, 메타세쿼이아 길이 시원하면서 아득한 길 양옆을 늘어서 있고, 그 길을 따라 걷자면 어머니가 머무시는 평온당이 나온다.
걸어가며 봉안당 한 칸에 계시는 어머니 봉안함에 붙일 꽃을 이리 저렇게 훔쳐보는 중, 한쪽 구석에 할머니 한 분이 흰 종이로 솜씨 있게 접은 듯한 조화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가 만드셨나 봐요!" 할머닌 자기 물건에 관심을 주는 내가 내심 반가웠는지 빙그레 웃으며 "우리 딸이 집에서 만들어요, 골라봐요."
언뜻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꽃의 수술을 예리하게 뽑아낸 것 하며, 꽃대도 생화보다 반듯하니 더 좋아 보였다.
가격도 생화보다 천 원이 싸고 오래간다는 장점이 돋보여, 하나 사 들고 기분 좋게 몇 걸음 옮기는데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와 소란이 일었다. 뒤돌아보니 그 할머니 옆의 꽃가게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노점상인 그분을 힐난하는 소리였다.
"할머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되니까 건너편이나 버스정류장으로 가요" "노인네가 눈치가 없네, 나 참"
기세등등한 그 점포주 아주머닌 팔짱을 끼고 할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나도 하나 사들면서 분명히 같은 목적의 용품을 파는 할머니가 걱정스럽긴 하였다. 할머닌 인심 사납다고 툴툴거리시며 주섬주섬 짐을 싸고 계셨다.
바로 옆 차도로 무슨 상조회사 로고를 붙인 영구차가 지나고 있었다. 또 누군가의 의식을 준비하러 가는 중인 듯, 메마른 겨울 아스팔트에 황량한 먼지가 일었다. 불현듯 저승과 이승의 경계 또한 별 차이가 없지 않나 싶었다. 살아있는 사람 중 누군가는 존재하기 위해 무언가를 지켜내야 하고, 그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아귀다툼의 소용돌이 속을 겉도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한 생각을 뒤로하고 내처 걸었다.
가는 길에 새로 짓는 봉안당이 공사가 한창이다. 네 개 동의 기존건물로도 모자라는지 여전히 봉안당은 지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사시는 동안 아파트에서 동 호수 찾는 것을, 치매 초기에 그렇게 힘들어하시던, 어머니는 평온당 3층의 615호에 살고 계신다. 맨 위층이라 햇볕도 잘 들고 전망도 좋아 모실 때, 맨 아래 칸이 아니길 빌었는데 다행히 눈높이 층에 모셔졌다.
유골함 봉안에도 그렇듯 가리고 따질 게 많았었다. 615호 칸에는 유골함과 어머니 사진, 그리고 여동생이 가져다 놓은 어린 시절 나와 엄마에게 안긴 여동생의 오십 년도 넘은 빛바랜 사진이 들어 있다. 뚝섬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은 여전히 다정하게 어머니 품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당신의 부모님 묘소가 없어 찾아볼 장소가 없는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 연 년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요즘처럼 화장문화와 봉안 장소가 흔치 않던 시절이기에 어려운 생활에 묘를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화장 후 유골함을 일 년 가까이 큰외삼촌이 집에 보관하다 한강 변 한적한 곳에 흘려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뚝섬 인근에 살 때 강변에 자주 어린 우리 남매 손을 잡고 나가시곤 하셨다.
아마도 강물 따라 흐르는 부모님의 자취를 느껴보고 싶은 심정이셨으리라 생각된다. 자주 하시던 꿈 이야기 중에 외조부모님이 나룻배 한 척에 흰옷을 입고 있으신 것을 꿈에 봤다고 얘기하시곤 팔꿈치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시는 모습을 자주 뵈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라도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를 볼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한 가지 죄송스러운 점은 먼저 가신 아버지 묘소가 강화에 있어 합사를 해드려야 하는데, 조부모님 묘소 바로 곁에 모신 아버지 묘소를 함부로 이장할 수 없어, 때를 봐서 같이 모시리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뵐 때면 조급함이 밀려오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옆 칸의 유골함 사진 속에 앳된 얼굴의 어린 여자애가 웃고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던 날 유난히 많은 참배객이 몰려와 울던 그 아이였다. 열 살 남짓의 이 아이는 생이 왜 그렇게 짧았을까?
가는 건 순서가 없다지만 삶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아 지금의 나이에도 모호해 이해 못 하는 면이 많다. 아마 영원히 누구도 풀지 못할 아이러니로 남을 테지만, 잠시 눈을 감고 종교는 없지만, 묵상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을 나섰다.
완연한 봄 날씨 같은 바깥공기에 가슴이 따스해지고 저무는 석양에 눈이 부셨다. 눈더미가 아직은 여기저기 눈꽃처럼 피어있는 작은 오솔길 공원로를 걸으며 나오는 길가에, 희한하게도 아직은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 한 철에 눈꽃 더미 속을 비죽이 노랗고 빨간 가녀린 꽃잎이 보인다.
복수초꽃이 봄을 알리는 정령처럼 한 줌 볕에 의존해 안간힘을 쓰고 버티고 있었다. 입춘에서 겨우 우수에 다다른 절기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복수초는 꽃을 피워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대견하고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종이접기 조화를 파시던 할머니를 찾는 내 눈초리는 버스정류장에 다다라서야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할머니 어떻게 다 파시긴 했나요?" 할머닌 환한 얼굴로 꽃 상자를 보이시며 다 팔았다고 하신다. 그리고 야박한 조화 점포주를 힐난하시고는 오히려 버스정류장인 이곳이 더 잘 팔린다고 함빡 웃으신다.
할머니는 가방 춤에서 삶은 고구마 하나를 건네며 옆의 벤치로 나를 앉히신다. 나이 사십이 된 하반신을 못 쓰는 딸이 종이 접기에 재주가 있어 조화를 만들면 그때그때 팔러 나오신다고 한다. 오늘은 운수가 좋아 다 팔았으니 딸도 좋아할 거라고 말하는 주름진 얼굴은 저무는 석양의 배경에 발그레하게 피어난 복수초꽃 같아 마음이 훈훈해진다.
버스에 오르는 할머니가 하루가 평온한 집으로 향하길 기원하면서 한겨울 눈이 수북이 쌓인 눈더미 속에도 꿋꿋하면서 가녀린 꽃잎을 내미는 복수초처럼 할머니도 그 따님도 희망의 나날을 지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