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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Dec 19. 2023

어조와 문체에 따른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상념 1



 음악은 귀에 들리는 수많은 감상을 감정과의 연동을 통한 음률에 따라 사람마다의 가슴에 감동을 아로새긴다. 보이는 것이 읽는 것에 우선하는 시대에 접어든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이미지와 선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드러지게 기억으로 남는다. 과연 글을 통한 감동은 가능한 것일까?


 음악과 동영상은 글보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음악의 목소리는 미세한 떨림도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기에 각자의 정서에 따른 감동을 준다. 동영상 또한 눈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이미지화되기에 글보다는 대중에게 전달의 목적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증폭되기도 한다. 하지만 글로 전달되는 의미의 확장성과 감동의 크기는 결국 문체와 어조일 수밖에 없다.


 건조체 문장으로 시종일관 쓰인 글이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분명한 건조체의 글도, 독자는 자신의 의도에 부합된다면 기꺼이 읽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나 경험에서 우러나온 스킬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배가 시키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런 글이 아니라면 결국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수필형태의 글이 주종을 이룬다. 결국 문학적 수사가 가미된 글이 읽는 이의 흥미를 붙잡아 둘 수 있다.


 독서는 나와는 다른 어조 즉, 말투나 독특한 스타일의 그 사람만의 어투를 말하는데 나와는 다르기에 그 자체가 낯선 경험일 수 있다. 문체도 각자의 지문처럼 특이한 개인적인 습성이나 취향이기에 읽기에 반하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난해함은 결국 어휘력의 차이로 인한 개인의 특성을 풀어 보이는 결말에 잘 나타나곤 한다.


 경험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양상에서 성차와 문화차가 나타나 듯, 각자의 글들도 즉각적인 감정과 인지판단이 다르기에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어조나 문체를 그대로 드러내 써보는 것이 오히려 호응을 얻을 수 있다.



  브런치에서 많은 독자를 얻은 글들을 보면 자신의 문체에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글들이 해답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목소리가 있듯이, 자신만의 어조와 문체가 있다. 자신감을 갖고 '난 이렇게 쓰는 걸 좋아한다'라고 써보는 것이다. 내 말투가 그렇듯 문투는 이러하다고 드러내는 일은 효용성 있는 글쓰기의 기초라는 생각이다.


 나는 내 문체와 어조대로 글을 써보지만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 때는 독서를 통한 단 한 권의 책을 선택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독서를 통한 문체 다듬기는 분명 효과는 있다. 특히 어휘의 다양성을 기르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시간은 없고, 많은 다독에 자신이 없는 경우에는 본받고 싶은 책 한 권을 반복적으로 읽어본다. 나의 경우에는 김훈 작가님의 《라면을 끓이며》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이 나라에서의 돈은 오래전부터 가치의 저장이나 결제의 수단을 넘어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의 위상은 법의 보호를 받으며 돈의 작동은 시장경제의 축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휘두르는 이 권력의 지배는 완벽하고 철저해서 그 지배권 으로부터의 이탈은 죽음을 의미한다.
-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2부 돈-


 내가 김훈 작가님의 글을 흠모하는 것은 선이 굵고 남성적인 매력에 끌리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부계사회는 종말을 고했다. 남성성은 왠지 꼰대 취급을 받고, 더구나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은 좌표를 잃은 것 같은 사회분위기와 상관성이 있다. 단말마와 같은 그의 문장은 미사여구를 혀용 하지 않는다. 정의한 듯 쓴 짧은 문장은 미로를 더듬어 출구를 찾듯이 흥미진진할 뿐이다. 나는 그런 매력에 반복해 읽을 때마다 탄복을 하곤 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와닿는 책 한 권은 있을 것이다. 무한 반복의 회독은 결국 닮아가는 첩경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나의 문체는 내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좋은 양분을 얻어 또 다른 진일보를 내딛을 것이다. 창조는 모방이 첩경이라는 말은 진리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살아서, 제 목소리에 노력한 만큼의 공명음을 낼 것이다.


 모든 낯선 경험은 결국 학습의 일환이다. 보고, 듣고, 흉내를 내다보면 결국 나만의 세계가 형성된다. 사회에서 나름의 세계를 이룬 대가들도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런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말을 배울 적에 모방할 상대가 있어야 말을 배우듯, 꾸준한 모방은 또 다른 창조의 자양분 역할을 충분히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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