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다른 날씨와 공기를 지녔던 그때, 나는 임신중이었다. 처녀 시절부터 먹어왔던 약을 끊고, 세상이 뒤집힐 만큼 어지러웠고,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히 잘 놀고 있었다. 임신 4개월이 좀 넘었을 때였는데 예민해진 입맛, 후각 등에 날이 서있었다. 같이 입원한 명숙이 언니는 지적 능력이 좀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는 어디서 빠졌는지 듬성듬성 있었고, 얼굴 반쪽은 화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언니에게 무슨 낙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좀 안된 사람이었지만 몇일 입원해 있으면서 그것은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숙이 언니는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했다. 가끔 귀찮을 정도로 우유를 먹으라고 갖다 주기도 하고 성경을 읽어주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는 꼭 내 옆에 달라붙어 먹었고, 내가 밥과 반찬을 남기면 꼭 그걸 먹고 싶어했다. 덜어 주면 너무 맛있게 먹었다. 명숙이 언니를 보면서 그때까지 생각해 오던 사람에 대한 편견이 조금씩 녹았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타인과 나를 줄 세워 때론 나보다 타인을 높은 곳에 올려 놓기도 하고 낮은곳으로 위치를 정하기도 한다. 우열에 따라 사람의 행복이 정해질 것 같지만, 묘하게도 비천함 속에 생명은 움트고 있다.
방정아, <집 나온 여자>, 1996, 60.6*72.7cm, 캔버스에 아크릴
방정아, <급한 목욕>, 1994, 97*145.5cm, 1994, 캔버스에 유채.
<까치호랑이대길부>, 한국, 시대미상,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방정아라는 여성 작가가 있다. 방정아는 일상에 잠재된 어두운 그림자를 화폭에 우화적으로 옮기면서 주목을 받았다. 가정폭력으로 멍든 살을 숨기려고 사람 없는 시간에 공중목욕탕을 찾는 장년 여성, 가사 노동이 만든 주름살을 훈장처럼 피부에 새긴 가정주부의 알몸, 여자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는 방정아의 그림은 1세대 민중 미술과 동일선상에 있되 일상의 부조리를 풍자하면서 시대 변화에 호흡을 맞췄다.1) 방정아의 <집 나온 여자>는 포대기에 아이를 들쳐 업고 어묵을 먹는 여성의 그림이다. 여성의 얼굴의 멍자국 처럼 벌겋게 살갗이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이다. 여성은 이런 아픔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처연하게 어묵을 먹고 있다. 가로등불 아래 여성과 아이는 작은 생명을 밝히고 있다. 비천함 삶 속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정폭력은 우리 주변에 심심치 않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여성, 노인, 아동, 장애인 등 연약한 이들이었다. 방정아의 <집 나온 여자>나 <급한 목욕> 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누가 봐도 사회 변두리에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특별히 남들보다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렇듯 고된 일상은 묵묵히 살아 내는 것이겠지... 맞고 나서도 어묵을 씹는 여자, 때를 미는 아주머니는 우리 삶의 비천함 속에서 생명력을 밝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삶은 결코 타인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민화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한 미술사학자 정병모 선생님의 강의와 글을 볼 기회가 종종 있는데, 그분이 까치호랑이에 대해 말씀하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까치호랑이에서 우습게 생긴 호랑이는 실제 우리 선조들에게 결코 우스운 존재가 아니었다. 실제로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갓난아이이며, 호환을 당한 조선사람은 많았다. 중국인들이 조선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 문상을 가는데 많은 날을 소비한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호랑이를 이렇게 우습고 친근하게 표현한 것이 특별하다. 우리는 늘 죽음 가까이에 살 만큼 일상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긍정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신의 장애에도 친근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왔던 명숙이 언니처럼 비루할 정도로 고된 삶을 긍정하며 땅에 발붙히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