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린 남자

by 박재은

‘명심해라. 너는 처자식의 노예이다.’ 신혼시절에 신랑과 대화하던 중 남자·여자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갔지만 아직까지 내 뇌리를 스치는 말이다. ‘명심해라. 너는 처자식의 노예이다.’ 이 말은 남자화장실에 가면 낙서로 써있는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화장실낙서가 화장실에서 인터넷 댓글로 이동했지만, 중학교를 다닐 무렵 자주 갔던 떡볶이를 파는 분식점에 가면 벽이며 테이블이며 낙서가 가득했었다. 나는 여자이지만, 이상하게 남성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들이 군대를 가는 것, 가장의 의무를 지는 것이 가장 큰 그들의 고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그 둘을 내가 참 못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하는 그들이 안타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예쁜 남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온갖 화장과 치장을 하고 미디어 앞에 선 그들이 낯설지 않다. 예쁘게 꾸미고, 사랑스러움을 연출하는 것은 과거에는 여성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남성성이라고 말하던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되었고, 가부장적인 생각이 강한 남성은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의 파편들이 떠오를 무렵 접한 이미지는 고등어 작가1)의 <살갖의 사건 – 웅크린 남자>였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은 그림이다. ‘웅크린 남자’는 침대 위에서 수치심 가득한 포즈로 웅크리고 있다. ‘웅크린 남자’는 신디 셔먼의 일련의 사진들을 떠오르게 한다. 신디 셔먼은 불완전한 주체인 여성을 주제로 자신이 직접 분장하여 사진으로 작업한 작가이다. 그녀의 작업들에 보이던 여성주체의 불완전성이 ‘웅크린 남자’에게 보인다. 남성은 어떤 수치심을 느낀 것일까?


지극히 사적인 신체의 행위인 섹스를 통해, 분출된 정념의 순간과 육화된 의식으로 ― 불안을 넘어서려는 신체에 대해 생각했다. 타자라는 외부를 받아들이는 신체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너가 애무할 때 내 몸은 나의 것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시작된 작업이다. 타자와의 내밀함으로 만들어진 신체는 분명 이전 나의 신체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시 섹스 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보여지는', '상처 입은', ' 읽혀지는' 여성의 몸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함으로써, 언제나 대상화 되었던 여성의 몸을 주체화시키는 과정에 있다. - 고등어 (드로잉 단상)


드로잉 단상에서 힌트를 얻어 보면 '웅크린 남자'는 성적 수치심을 겪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남성에게도 성적 수치심이 있는가?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性은 여성이 보기에는 조금 미안한 말로, 충동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性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자극이다. 더불어 느끼고 싶은 것은 어머니의 따듯한 품 같은 따사로움이다. 남자가 여자를 찾는다 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찾는 것도 어머니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도 관계되는 수도 있지만, 그래서 정신분석도 그렇고, 불교도 원각경에 있지만 ‘중생고’ 즉 인생의 고통은 미움과 사랑에 원인이 있다. 2) 결국 사랑하고 싶은 욕구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무언가를 받고 싶다는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다. 물과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 사랑 일진데, 우리는 너무도 감사함을 잊고 산다.


옛 그림에서 性을 다룬 가장 유명한 화가는 신윤복이다. 신윤복은 기생과 함께 하는 남성들을 다수 그려왔다.

<유곽쟁웅>에서는 말 그대로 유곽에서 싸움이 난 모양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는 무리를 벗어나 중앙을 보면 윗옷을 열어 헤친 남성이 서있다. 화가 난 것도 같고 호기롭게 보이기도 하나 어딘지 남성이 우스워 보인다. 이 남성을 더욱 우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이것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지겨보고 있는 오른편의 기생이다. 유곽의 사내는 기생에게 보란듯이 자신의 용기를 뽐낸다. 그런데 어쩌랴.. 여성에게 진심이 아니고 순간의 쾌락만을 바란다면 유곽의 사내는 언제나 우스운 꼴을 당할 것이다. 고등어의 ‘웅크린 남자’와 <유곽쟁웅> 속 화가 난 남자는 어쩌면 갈애(渴愛)라는 똑같은 감정 앞에 헐벗겨진 것이 아닐까?


1) 고등어 작가를 딱 한번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홍대의 옷가게였다. 그녀는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미술이론을 함께 공부한 과동생과 그 가게를 방문했다. 그녀의 머리는 스포츠에 가까운 컷트였고, 그녀는 내가 느끼기에 친절했다. 우리가 옷을 사지 않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 이후 그녀의 얼굴을 모니터에서 봤다. 그것은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참여 작가 인터뷰 영상이었다. 그녀에 대한 내 첫인상이 강렬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전시에서 나는 처음 그녀가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이동식, <이동식 선생님과의 대화 - 정신병의 이해와 치료>, 한국정신병심리치료학회지



2017051203c.jpg 고등어, <살갖의 사건, 웅크린 남자, 종이에 연필, 29.7*21cm, 2017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유곽쟁웅_PS0100100102001077100000_0.jpg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유곽쟁웅, 가로 14.4cm, 세로 11.9cm, 현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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