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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은 Jan 12. 2023

체념

나의 애정하는 생활 

생전에 소암이동식 선생님은 포기할 것은 포기하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책을 닳도록 읽었지만, 염두에 두지 못한 말이다. 얼마 전 까지도 나는 전시기획안 쓰기에 몰두했다. 언젠가는 실현이 될 거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글을 퍼가는 매체에도 기획안을 보내봤다. 대답은 작년에 내년 즈음으로 실행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두리뭉실한 대답이었다. 잠깐 설명하자면, 나는 전시기획을 하는 과를 졸업했다. 우리 과에서는 전시기획을 주되게 공부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기획안 작성은 괜찮게 한다. 다만, 현장에 못 나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경력단절, 나이, 실전부족 등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심약하다. 전시기획자도 비교하자면, 영화감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캐스팅에 들어가고, 예산을 따고, 장소헌팅을 하고, 시나리오 작가와 대화하고, 여러 가지 일을 총괄한다. 전시기획자는 우선, 글을 잘 써야 한다. 전시의 개념을 도출하고,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섭외를 하고, 전시일정에 맞춰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이런 것을 총괄하기에 나는 너무 심약하다. 전시 일정을 못 맞추면 어쩌나.. 미술작품이 전시공간과 안 맞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들이 나를 압도해 버린다. 그래서, 몇 번의 기회도 있었지만, 현장에 못 있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여러 매체를 돌며, 예술 관련 글을 썼다. 원고료를 받은 적은 두 번뿐이고, 모두 무료로 썼다. 이런 나를 남편은 '예술활동'을 한다며, 치켜세워줬다. 나는 정말 남편 말대로 '예술활동'을 한다고 착각하고, 조금씩 글을 썼다. 무언가 의미부여도 거창하게 하면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 글을 쓴다는 것은 묘하게 자존감을 올려줬다. 아이는 엄마가 어려운 책도 읽는다며, 과외 선생님께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런 가족들의 지지 덕분에 나는 한동안 자존감이 높아졌었다. 그런데, 요즘은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이다. 미술평론가이자 갤러리스트인 선생님의 갤러리에 간 적이 있다.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 미술비전공 작가, 미술작가 등을 초대하셨다. 와인도 먹고, 즐거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나는 즐겁지 못했다. 처음 보는 몇몇 미술작가에게 원고료를 못 받는다는 하소연도 하고, 대화를 해보았지만, 즐겁지가 않았다. 예술학과를 다니는 한 학생은 '선생님 석사까지 하셨으면, 하실 수 있을 텐데요.'라는 말을 하며, 전시기획 공모전도 이야기해 주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미술사학자이자 고미술기획자 선생님에게 인터넷 메신저를 보냈다. 기획안을 검토해 보시고, 실현하실 수 있으면 실현해 보셨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은 고맙게도 메일로 기획안을 검토하시곤,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전화를 해보니, 역시 전시기획 공모전을 이야기하셨다. 들어가 보니,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공모요강은 1500만 원 정도를 지원하고 있었다. 사비로 10% 자비를 부담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기획안은 고미술을 아이디어로 하고 있는데, 내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을 끌어다 쓸 수 있나? 대여를 해주나?부터 돈을 벌 수 없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못하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메일을 썼다. "선생님, 기획안을 하나 더 보냅니다. 실현하실 수 있으면, 하시고, 안 돼도 할 수 없지요. 만약에 하시게 되면, 최초기안자가 저임을 밝혀 주십시오. 그리고, 원고가 활용이 된다면, 원고료를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이마저도 쉽지는 않겠지요." 메일을 보내고 나서 눈물이 나왔다. 안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했으면, 더 편했을까? 그럼 나는 아이가 학원에 간 시간에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사람의 아이디어도 돈이 되는 세상이 온다면, 나 같은 사람도 조금은 편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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