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가 너였으면 형수한테 벌써 이혼당했다. 짜슥아!"
남편이 축구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한 동생과 한참을 통화를 한다.
그 동생은 자신의 절친에게 돈을 오천만 원이나 빌려주었는데 돈을 받지 못해서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사업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서 돈을 빌려준 것이었는데, 그 친구는 투자금이었기에 돌려줄 필요가 없다며 맞소송을 걸었다.
"살이 쪽 빠졌더라. 절반이라도 돌려받았으면 하던데 힘들 것 같아."
친한 동생을 만나서 한 참을 하소연을 듣고 온 남편이 말한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그 건장하던 분이 살이 그렇게나 빠졌을까.
"돈을 빌려줄 땐, 가족보다 아끼는 마음으로, 정말 그 친구를 위하는 마음을 담아서 빌려줬을 텐데, 잃은 돈 보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정말 크겠지. 그게 아픈 거지. 그러니까 자기도 돈 빌려줄 생각 하지 말고 못 받아도 되는 정도만 도와줘.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어설프게 돈 빌려줬다가 못 받으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잃게 되는 거니까! 상춘 씨도 액땜 한 번 거하게 했다고 생각해야지."
"고객님. 105동 1003호. 계약하셨죠? 저희가 보여드린 집인데 다른 부동산이랑 계약하셨네요? 그럼 안되는데..."
"아. 그래요? 그쪽 소장님이 괜찮다고 하시던데요."
"저희 부동산이랑 그 집을 봤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네. 말씀드렸어요. 괜찮다고 하시던데요."
부동산 일 하면서 가장 기분 나쁜 상황이다.
들키지나 말지.
참을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가 자꾸 가만히 있으니 창고 속 쌓여있는 가마니로 보는 것 같아서 두꺼비에 전화를 한다.
"소장님. 105동 1003호 저희가 보여드리고 금액이랑 동 호수 고객에게 보낸 문자내역. 그리고 그 집을 저희 부동산이랑 봤다고 한 통화내역 다 있어요. 소장님이 정리 좀 해주시죠."
나의 전화에 두꺼비 부동산 할머니 소장이 발끈한다.
"아니, 난 정리 못하겠어요. 법대로 하세요. 판례에 의하면. 어쩌고 저쩌고."
아, 이 분. 법 좋아하시나 보네.
이성의 끈을 놓고 원초적 자아의 모습에 돌입한다. 목소리가 커진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법 운운하는 거 들으려고 전화한 거 같아요? 손님이 다른 부동산과 집을 봤다고 하면, 그 집은 같이 봤던 부동산이랑 계약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동산 하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이 매너 아니에요? 같은 동네에서 붙박이로 붙어서 하는 부동산끼리 최소한의 매너도 없이 일 더럽게 하실래요?"
웅변대회 나온 연사보다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진다. 욕까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는다.
그래 좋다. 니 마음대로 한 번 해봐라. 이제 급발진이다. 앞으로 나도 더티 플레이가 뭔지 제대로 한 번 보여주마 하는 굳은 결심을 한다.
전화를 끊고 이 일을 지금 당장 키울 것이냐, 아니면 서서히 용의주도하게 복수를 할 것이냐 고민하고 있는데 헐레벌떡 두꺼비 할머니랑 웬 남자가 한 명 우리 사무실로 뛰어온다.
"누가 우리 엄마한테 소리 질렀어!"
내 또래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수첩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문을 벌컥 열고 뒤에는 두꺼비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쫑알 거린다.
분노가 차 오른다.
정확한 딕션으로 데시벨을 있는데 까지 끌어올려 소리를 지른다.
"법 좋아하시나 본데, 그래요. 녹취 있고 문자 있느니 한 번 해봅시다. 소장님 마음대로 하시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할 테니 한 번 해보자구요!"
이미 눈 돌아서 말이 안 통한다 느꼈는지 할머니 소장은 사무실로 돌아가고, 기세 좋던 그 중년의 남자는 손님 테이블에 허락도 없이 주섬주섬 앉는다.
"누구세요?" 방금 들어올 때 아들이라고 한 건 들었지만 심히 짜증 난 목소리와 무시하는 말투로 물었다.
"아들입니다."
"그래서요? 내 사무실에서 나가 주시죠. 들었겠지만 나도 할 수 있는 거 하고, 두꺼비도 맘대로 하시면 됩니다"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계속 다다다다 소릴 질러 그런지, 아니면 내 말이 맞다고 생각을 했는지 남자가 조금 기세가 누그러진 자세로 앉아있다.
"가시라구요."
"아니요. 아니요. 해결을 해야지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쩌긴 뭘 어째. 각자의 길 가는 거지. 이미 신뢰는 바닥이 났고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지저분하게 하는 거지.
나도 안다. 따져 봐야 이 계약건으로 두꺼비한테 할 수 있는 우리만의 비책 따윈 없다는 걸.
그냥 짜증 나니까 소리 한 번 지르는 게 다라는 것을.
그래도 한참을 앉아서 변명 혹은 자신만의 논리로 일단 사태를 풀어보겠다는 의지는 보여주는 것 같아서 화는 조금 누그러진다.
"수수료 절반 주시고요. 재발방지 약속해 주세요"
옆에 있던 실장님이 또박또박 이야기하니 그러면 되겠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두꺼비 소장님의 아들.
"아뇨. 됐어요. 수수료 절반까지도 필요 없어요. 실장님도 저도 이 뙤약볕에 나가서 여러 번 안내를 했고 실장님은 저녁을 먹다가도 튀어나가서 집을 보여준 손님이었어요. 실장님 안내 수수료 정도 챙겨주시면 됩니다."
그 손님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랑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 하기로 하자.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뭔가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서 한 마디쯤은 해야겠다 싶어서 짚은 것이다. 아마 두꺼비 소장은 아들이 설득을 한다고 해도 단 돈 십원도 토해내지 않을 사람이란 것도 알고 있기에 기대란 것은 없다. 그래도 한참을 앉아서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덕에 기분은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며칠 동안 구린 기분이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것은 어쩌지 못하지 싶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고 쉴 새 없이 쌓이는 먼지를 털어내도 사람은 돈 앞에서 참 작아진다.
공수래 공수거니 삶에서 돈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느니 삶의 본질을 찾는다는 둥 의미를 찾는다는 둥 해도 결국 돈 앞에 속절없고 돈 욕심에 조갑증을 내며 파닥 거린다. 아무리 초연한 척을 해봐도 뱃속이 우리하게 아파오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아마 남편의 지인은 꽤 긴 시간 마음도 많이 아프고 의지를 잃을 것이다.
나도 내가 벌었어야 할 수수료 몇 푼에 이렇게 속이 쓰린데 열심히 일해서 벌어 모아둔 돈 5천만 원을 떼인 그분은 오죽할까.
그러나 어쩌겠나.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속이 쓰리면 쓰린 대로 겪어야지. 아프고 슬프고 힘든 것도 경험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거라면 괴로워해야지.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마저 모른 척하고 은폐하려 하면 어떡하나. 상처가 아물 때까진 아파하는 것이 맞겠지.. 그러다 보면 부러졌다 붙은 뼈처럼 더 단단해지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흉터로 가득한 늙었으나 질기고 두꺼운 가죽을 가진 무언가가 되겠지.
내가 겪어야 할 괴로움이라면 충분히 괴로워하되 그래도 세 가지는 기억하려고 한다.
첫째. 내가 힘들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장티푸스나 코로나 같은 괴질처럼 전염성이 강하니 주변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기. 일단 혼자 씩씩거려 보고 일기장에 내 마음 상태도 써보고 가만히 있는 베개도 때려보고 슬프면 울어도 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한다.
둘째. 내 고통의 원인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버리거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치부할지언정 그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은 키우지 않기로 한다.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만큼 나를 헤치는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셋째. 오늘 또 하루만큼 죽는 날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이러나저러나 나는 바람에 날리는 흙 되고 먼지 되는 존재라는 불변의 진리를 잊지 말자. 그러니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도 끝이 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자.
뭐... 그러다 보면 좋은 날, 신나는 날 또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