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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화 Aug 19. 2024

502호 602호

빌런들의 전쟁

우리 실장님은 옆 블록 아파트 1동 802호에 산다. 1동 반장님 되시겠다.

(자랑스럽다!)


재작년 어느 겨울, 젊은 부부 한 쌍이 집을 보러 왔다.

아들 둘을 키우고 있어서, 1층 매매를 하고 싶다고 했다.

딱 봐도 에너지가 넘치는 어린 두 아들. 반드시 1층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집이다.

근 2달 가까이 실장님이 1층이 매매로 나온 집을 다 뒤져서 열심히, 참으로 정성껏 보여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꽤 좋은 1층이 나와서 전화를 하니, 이  젊은 내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문자도 씹는다. 실장님이 쏟았던 긴 시간의 노력이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있다.

그냥 전화받아서, 다른 집이 맘에 드는 것이 있어서 다른 부동산에서 계약했어요~!. 한 마디 하면 

지금 당장은 섭섭해도 분할 것까진 없는데,

두 어달 헛발질했구나.. 생각하면 되는데.  

이 매너 없는 부부는 그 사람들을 위해 늦은 밤이고 밝은 낮이고 열심히 집을 보여주었던 우리 실장님에게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


그런데.

이 분, 옆 블록에 우리와 나름 경쟁구도를 이루고 있는 두꺼비 부동산에서 계약을 했더란다.

그것도, 우리 실장님이 사는 동의 아래 아랫집. 602호를!!

"아니, 1층 아니어도 되면 미리 말을 하지. 우리한텐 꼭 1층이어야 된다더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욕설이 섞여 있지 않아도, 실장님의 깊고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그러려니 해.  어쩐지 관상이 우리 부동산하고 안 맞는 느낌이었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 젊은 내외... 꽤 오랫동안 잊히진 않을 듯하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에서 실장님과 우연히 만난 602호 젊은 내외는 1동 반장님이신 우리 실장님의 정체를 알고 처음엔 상당히 쭈뼛거렸다고 한다. 

"어머 어머 어머! 반가워요. 여기 사세요?  6층? 

1층 찾으신대서 우리 동네 1층은 다 보여 드린 것 같은데, 에이 1층 아니어도 된다고 하시지?! 

우리 같이 집 보러 다닐 땐 많이 추웠는데 벌써 봄이다 그죠? 오 호호호....."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훔쳐 먹다가 들킨 강아지처럼 천장을 보거나 딴청을 피우며 실장님의 시선을 피했다. 넉살 좋은 실장님이 속이 없어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보였는지, 어느새 '언니, 언니~' 하며 실장님에게 질척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1동 502호.

마음 여리고 순하디 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몸이 약한 편이라 깡마른 체구를 가졌지만, 늘 집을 유리알처럼 닦아 놓고 사는 윤주 씨는 우리 실장님과도 꽤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한다.

남편도 아내도 평생 큰 소리를 내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생겼다. 

부모를 닮아, 조용하고 예쁜 초등학생 딸을 키우는 502호 부부는 아파트가 준공이 난 후로 지금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602호 젊은 내외가 이사 온 이후, 502호는 더 이상 스위트 홈이 아닌 지옥이 되어 버렸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뛰는 602호의 두 아드님 덕분에 실장님의 친구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고 한다.

부탁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할 수 있는 건 다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아이들을 묶어 두어야 하느냐. 우리 애들은 많이 뛰는 편이 아니다. 아파트 살면서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니냐!'

였다고 한다.


'집에 들어가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해요. 언제 어떤 강도로 소리가 날지 몰라서 늘 불안해요.'

결국, 502호의 순한 부부는 이사를 결심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살고 계신다는 중년... 그러니까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모님 한 분이 우리 부동산에 방문을 하셨다.

전세 만기가 다 되어 가서, 이참에 집을 하나 사고 싶다고 하신다.

이 분... 기억난다. 

먹던 떡을 빼앗긴 사람마냥 불만 있어 보이는 뚱한 표정. 

대화 중에 시선을 피하며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했던 사람.

인상적이었지...

재작년에 우리 부동산에 전셋집을 알아보러 오셔서 열심히 보여 드렸었지. 

마치 당장 계약을 할 것처럼 나를 설레게 하더니만 결국 연락을 끊었던 분.

내가 열심히 안내했던 그 집을 나에게 아무런 고지도 없이, 저어기 아랫동네 어느 부동산을 통해서 냉큼 계약하셨던 그분. 

나의 뒤통수 세게 때리셨던 분.

나는  이 사모님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분은 날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다.

모른 척했다.

옛일 끄집어내서 뭐 하리. 이번엔 안 그러겠지.


매매로 나온 집을 몇 개 보여드리니,  3층이 맘에 든다며 계약을 하시겠단다.

내일 오전에 사무실에 와서 가계약금을 입금을 할 테니, 저녁에 남편과 와서 집을 한 번 더 보자고 하신다.

밤늦게 다시 한번 집을 보여 드리고, 내일 오전에 가계약서를 써 둘 테니 사무실로 오시라고 했다.

남편분도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데, 이 사모..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예전처럼 대화하면서 눈도 맞추지 않는 것이.. 또 뒤통수 씨게 후려칠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다음날 아침......

나쁜 예감은 적중률이 높다.

이 아줌마. 또 전화 안 받는다. 상습범이다.

'또 당했군, 이 아줌마 나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번번이 이렇게 빅엿을 날리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소장님. 윤주네 집 팔렸어요. 드디어 이사 갈 수 있어요."

"오? 그래? 어디서 팔았대?. 우린 그렇게 열심히 해도 안 팔리더니만."

"두꺼비요. 두꺼비에서 팔았대요."

"아이 씨. 또 두꺼비야?!. 할머니 전투력 장난 아니라니깐. 아우 ~ 열받아!!!"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

"근데... 누가 샀는지 아세요?"

"?"

"얼마 전 우리 부동산에서 집 보고 간 아줌마요. 가계약하러 온다고 해놓고 잠수 타신 분요. 그날 우리 부동산에 계약하러 온다고 해놓고 두꺼비에 갔었나 봐요"

"아... 그랬구나...... 우리도 실장님 친구 집을 보여줄 걸 그랬네. 우리한텐 큰 평수만 찾는다고 하더니만..."

조금 안일했던 것 같다. 아무리 큰 평수만 찾아도 한시라도 빨리 팔아야 하는 실장님 친구집을 떠올렸으면 좋았을걸... 결과가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사모님 괜찮으시려나?  602호는... 거실에서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망까기 오징어 게임, 축구 야구 등을 하는 아드님들이 계신데.


어쨌거나.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윤주네 부부 경축!

그리하여 자신들이 일삼는 무책임하고 매너 없는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랫집 윗집으로 만나게 되었다. 

느낌이 온다.

뭔가 스펙터클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차라리 다행이다. 두 집 모두 우리 부동산에서 계약한 집이 아니어서.

팝콘을 준비해야하나?




"소장님. 소장님. 우리 아파트 난리 났었어요"

주말 저녁. 실장님의 다급하지만, 흥미로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

"글쎄 지진 난 줄 알았다니까요. 방금 전에 세상에, 502호 사는 아저씨가 602호 대문을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욕을 하는데, 와.... 802호인 우리 집이 다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오호... 드디어 터질게 터졌네"

"난리도 아니었어요. 와.... 502호 아저씨 진짜 무섭던데요. 막 욕하면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우리 집 대문 두드리는 것처럼 큰소리가 났다니까요. 602호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안에서 미친 듯이 광광 뛰고 있고..."


502호에 윤주네가 이사를 가고, 뒤통수 후리기 전문 아줌마네가 이사를 들어간 이후,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한다.  점점 강도는 심해지고 결국 온 아파트 사람들이 다 나와볼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매일이 전쟁. 두 집다 한 치의 양보도 없고, 이러다 무슨 사달이 나도 나겠다 싶더니만... 결국 502호가 백기를 들고 이사 온 지 육 개월이 되지 않아서 이삿짐을 쌌다.


502호 아줌마네는 집을 팔지 못하고 비워둔 채로, 다른 동네에 전월세를 얻어서 간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있는 모든 부동산에 집을 내어 놓았는데,  그 집을 중개했던 두꺼비 부동산과 우리 부동산은 예외였다. 층간소음 심각한 집을 중개한 두꺼비 부동산은 그렇다 치고 우리 부동산엔 왜? 내놓기는 부끄러워서? 두 번이나 엿 먹여 미안해서?  모르겠다...  

행여 우리 부동산에 매도 의뢰를 했다고 해도 나는 중개를 할 자신이 없으니... 잘하셨네.


"흥! 아랫집에 집 보러 오는 인기척만 들려도 아이들 보고 뛰라고 할 거예요. 아이들 없으면 저라도 거실에서 발망치 찍으면서 돌아다닐 거예요.  집이 팔리도록 두놔봐라!!!"

아랫집과의 전쟁에서 깊은 앙심을 품은 602호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씁쓸하다. 그리고 신묘하다.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것들은 서로 끌어당긴다는 양자물리학이나, 시크릿 이론 등등을 업신여기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저리도 비슷한 사람들이 아랫집 윗집으로 만났단 말인가!.

비록 502호가 짐을 싸서 떠나긴 했지만 시즌제로 나오는 잔혹 스릴러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조만간 part 2가 개봉할 것 같은 기분.



2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두 집을 쫓아낸 602호 젊은 내외와 그 댁의 기운 찬 아드님들은 오늘도 집에서 신나게 뛰고 계시고, 비어있는 502호는 지금도 팔리지 않고 있다.

602호는 저 쌓아둔 업을 어떻게 치르려고 저러나. 결국 신문기사 사회면에 등장을 한 번 해야 정신을 차리려나...


킹스맨 아저씨가 그랬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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