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심리 상담을 받을 때, 나는 고민이 몹시 많았다. 남들이 보기엔 무난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이런 문제로 여기에 앉아서 상담을 받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상담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군요. 당신의 어려움을 ‘겨우’라는 단어로 표현하다니……. 안타까워요.”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의 말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봤다. 자신의 어려움을 가볍게 여겨 방치한 채로 살아왔다. 10년이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는 분명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글쓰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가 종종 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을 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부연 설명할 예가 떠오르지 않을 때, 모든 문장이 산만하게 흩어져서 주제로부터 도망칠 때. 그럴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넘어진 자리에서 해결책이 떠오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무너지거나 접어버린 글이 차고 넘쳤다.
임어진의 소설 「아이 캔」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룬은 재활 훈련 장치들을 놓고 캔과 실랑이를 벌였다. 캔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룬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돌봤다. 둘의 모습을 본 친구 소이가 이렇게 말했다.
“룬, 힘을 좀 빌리는 것뿐이야. 어차피 사람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아. 필요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우울증이 낫지 않고 수년 째 지속되자 나는 여러 방면으로 해결책을 알아봤다. 심리상담을 받고, 트라우마 치료를 시작하고 내 몸과 마음 상태를 적극적으로 기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진료 때마다 상세히 털어놓았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혼자서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할 수는 없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쓰는 글이니 당연히 글을 쓰다가 막힐 수도, 단어가 생각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이 힘들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선, 글을 쓰다가 막히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 정지된 뇌에 쉼을 주는 방식이다. 그의 글 속에 푹 파묻혀서 그의 생각과 문체에 흠뻑 빠진다. 잠시 후 텅 빈 머릿속이 새로운 샘물을 부은 것처럼 맑고 상쾌해진다. 기운이 솟는다. 특히 내가 쓰고 싶은 문체를 가진 작가의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된다. 그의 문장을 똑같이 쓸 수는 없지만 그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가 나를 거쳐 새롭게 탄생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국어사전을 찾아보거나 초록창에 생각나는 아무 단어를 입력한 후 유의어나 반의어를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가 잊었던 단어를 우물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다. 혼자서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떠올리느라 끙끙대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어찌할 바를 몰라 짜증을 많이 냈지만 이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자신을 믿는 일이 중요하다.
다음은 나에 대한 믿음과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용기를 가지겠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여러분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글이기도 하다.
나는 10년에 걸쳐서 심각한 우울증 삽화를 3번 겪었다. 첫 번째 삽화에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고, 두 번째 삽화가 시작되고 몇 년 동안은 약을 먹지 않았다. 심각한 우울증 상태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다.
사람들은 대게 우울증 환자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위대한 일은커녕 일상적인 일조차 버거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했다. 한때 나는 고층 창틀에 앉아 있었고 죽고 싶어서 목을 맸다. 꼬박 밤을 새우며 죽음과 삶의 경계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할 때 타오르는 붉은 태양과 까마득한 높이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살아있기를 선택했다. 당장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지만 내가 맡은 학급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중증 우울증과 식이장애를 가진 채 치료도 받지 않으면서 아이 둘을 혼자서 돌봤다.
고통과 고난의 절대적인 척도는 없다. 나는 내가 짊어진 짐이 결코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왜 이런 내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2019년에 세 번째 우울증 삽화를 겪었다. 죽고 싶었지만 죽으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어서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연락했다. 그는 병원을 알아봐 주고 예약까지 했다. 나는 전화를 걸어 병원 예약하는 일조차 힘겨워하면서 학교 일은 죽을힘을 다해 마무리했다.
나는 내 안의 강인함과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큰 인간인지도 모른다. 정서적인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유년기의 결핍 때문에 알 수 없는 패배감과 자책감을 가진 채 늘 살았다. 성공보다는 실패를, 시작보다는 끝을 떠올렸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도망갔지만 사회적 인간으로서 가지는 책임은 포기하지 않았다. 교사로서 남다른 소명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정서적으로 고양된 상태라는 사실을 느낀다. 과거를 통해 내가 가진 힘을 느끼고, 앞으로 다가올 문제에 대해 잘 해내리라 믿는다. 내일 다시 눈을 뜨면 온갖 걱정 때문에 불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겠지만 삶을 지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말로 하고 싶지만 글이 더 편하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네 번째 우울증 삽화를 겪더라도 제발 나를 내버려 두지 않길 바란다. 내가 고립감을 느끼고 홀로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말이다. 특별히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가만히 곁에 있어만 줘도 나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절대 부탁하지 않을 일이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가진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에 미리 말하고 싶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내가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나 홀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