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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텔라 Nov 12. 2020

몹쓸 가을

3층 할머니는 가을을 탄다

창밖을 내다보는 일은 여전히 고상하고 산뜻한 일과지만, 이 계절에는 얼마 못 가 걸쇠를 잠궈야 한다. 찬 공기가 무례하게 집안을 헤집으니까. 베란다에 머무는 시간이 줄면서 텃밭을 마주하는 시간도 멀어졌다.


옷걸이가 휘도록 무거운 외투를 꺼낼 즈음이었던가, 아니 그 전에 긴긴 장마가 끝난 직후부터였던가. 텃밭은 생기를 잃었다. 토마토와 고추가 흉하게 무너졌다. 짓물러 눅눅하게 변한 마른 줄기를 당겨서 뿌리채 뽑아버렸다. 끝없이 돋아나던 깨도 풍성한 잎 사이에 꽃대가 섰다. 꽃이 필 차례가 왔다는 것은 잎의 시절이 지났음을 의미했다. 무용한 풀을 걷어낸 후로는 눈꺼풀이 풀린 개가 와서 똥을 싸지르고 갔다. 새로운 작물을 심어도 됐을 텐데 차일피일 파종을 미뤘더니 어느덧 10월이 지났다. 땅이 쓸쓸해졌다.


생장을 쫓는 열정은 식었어도 흙마저 쇠하도록 버려두진 않았다. 남편은 한 주에 한번 꼴로 냉동실에 모아둔 음식물찌꺼기를 들고 나갔다. 삽으로 흙을 뜨고 패인 자리에 언 찌꺼기를 던진 다음 삽 모서리로 잘게 깨어서 쓸쓸한 땅에 스미도록 했다. 돌아가며 흙을 엎고 갈았더니 결이 고와지고 짙어졌다.


- 뭐 심을 거야?

- 이제 뭘 심을 수 있을까요

- 이제는 못 심지. 올해 농사는 끝난 거여


그래 놓고 할머니네 밭은 여전히 푸르렀다. 시금치와 대파로 초록이 가득한 할머니네 밭은 흙바닥이 보일 틈이 없었다. 고목을 지지대 삼아 기르는 토마토 역시 2미터는 족히 넘게 자라서 이 차가운 날씨에 또 열매를 맺었다. 같은 빌라 3층에 사시는 할머니는 오전이면 근처 초등학교 급식소에 나갔고 태양빛이 정점을 지난 늦오후부터는 밭일을 하셨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는 동안 수확한 작물이 엄청났다. 열무를 심고 거두기를 네 번 반복했고, 갖가지 쌈채소와 고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잘라도 잘라도 재생의 한계를 모르는 부추를 부옇게 색바란 플라스틱 보울에 담아 나르곤 하셨다. 기껏해봤자 50센티미터 간격 떨어진 밭이 휑한 우리 밭과는 영 다른 세상이었다. 계절이 오래 머물렀다.


증손주가 서른 깨였던 것을 감안하면 할머니는 나이가 여든 안팍일 터였다. 성실한 인생이 밴 작은 체구는 몸 쓰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하루에만 수차례 3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밭을 돌보셨다. 그날은 내가 평소처럼 베란다에 서서 인삿말을 건넸고 잡초를 뽑던 할머니는 인기척에 반응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부쩍 춥네요. 그런데도 밭일에, 대단하셔

- 요즘 아기 소리가 안 들리네

- 어린이집 가잖아요 이제

- 날이 추워져 그런가 영 적적해. 아기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

- 춥잖아. 문들을 꼭 닫고 있어서 그런가봐

- 계절이 바뀌니까 쓸쓸하고 기분이 이상해. 마음이 영 그래


쓸쓸하다는 말이 노골적으로 쓸쓸해서 나는 당황했다. 그렇죠, 날이 추워지면 그래. 대충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대처가 어수룩했다. 할머니가 뱉은 쓸쓸함이 속눈썹에 맺혀서 하루종일 아른거렸다. ‘쓸쓸하다’는 말은 눈치도 없이 살점 하나 소실되지 않고 내게 엉겨붙어 며칠을 지냈다.



몇날 며칠 할머니의 서운한 표정과 사선으로 잦아든 목소리, 그 쓸쓸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날이 추워져 그런가, 기분이 이상해. 날이 추워져 그랬을까요, 그러게 왜 이렇게 막막한 걸까요.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이제는 기분 좀 나아지셨으려나 궁금해서 3층에 올라가보려다 관두었다. 간들 무슨 말을 하나. 쓸쓸함은 나도 별 수 없는데. 쓸쓸함은 쓸쓸함을 기억하지.


빌라의 아홉 세대 중 여섯 세대가 쪼개어 관리하는 텃밭에는 칸칸이 저마다의 작물이 심겼다. 이렇다 할만큼 면적이 확보되지 않은 모퉁이 땅은 할머니가 덤으로 챙겼다. 텃밭 전체를 아우르는 테두리에 만개한 가을 꽃들이 다 할머니 작품이었다. 새빨간 백일홍을 중심으로 양 옆에 품종이 다른 국화가 흐드러졌다. 이토록 다른 꼴을 하고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의아할 만큼 국화는 하얗고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모양과 크기를 달리했다. 우리집에서도 창문을 열어젖히면 국화향이 성큼 들어왔다.


1층에서 호수를 내리면 비교적 수월하고 빠른 작업이 될 것이라 안쪽 화단은 우리가 맡아 물을 주기로 했다. 할머니는 그 외 화단은 본인 일이라며 물을 주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겨우 안쪽 화단만 적시면서 텃밭 모든 꽃들을 만끽했다. 창문 가까이에는 구절초 세이지 설악초가 피었지만 집 안쪽에서도 멀리 내다보이는 국화의 끄트머리가 정겨워서 나는 국화를 더 친근하게 느꼈다. 겨울 내도록 국화가 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 덕을 많이 봤다. 화사한 색감이 매일 새로워서 남편과 나는 볼 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했다. 세상에, 오늘도 예쁘네. 못이기는 척 스름스름 움직이는 꽃잎 덕분에 소심한 바람을 알아채기 쉬웠다. 아스팔트와 시멘 바닥이 지겨운 고양이들이 꽃자루에 코를 대는 장면도 좋았다. 할머니는 꽃을 주고 계절을 주었는데.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막막하고 심란한지 깨닫지 못했다. 쓸쓸함의 단어를 꺼내는 대신 국화를 바라봤고 행복이 한 줌 더 보태졌다고 믿었다. 실로 그랬다. 그날도 할머니를 보기 전까지는 삽 뜨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우리 참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쓸쓸함이 남은 밤에는 소리 없이 울었다. 외로워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믿고 있지만, 믿는 것만으론 채워지지 않는 현실이 있잖아.


그때 남편은 삽을 푸면서 울고 있지 않았을까, 등지고 선 그의 앞모습을 상상했다. 내일은 웃겨줘야지. 남편이야말로 자주 쓸쓸함을 삼킨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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