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남편의 잇따른 폭력과 분노 표출로 ”아이 낳고 이혼하겠다 “고 생각했던 나는 ”아이 낳아 “ 이혼 못하고 있었다.
”큰 아 그라이 입덧 심했으면, 작은 아는 안한데이“
내 속내는 모르고 큰 아이 가졌을 때 입덧이 유난히 심했던 나에게 둘째 가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할머니가 한 말씀이었다.
이렇게 아이 키우며 살려면, 큰 아이에게 동생이 있어야겠다고도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 저으면서 남편이랑은 이제 그만 살아야지 생각하던 어느 날 밤, 귀가하지 않은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벽 2시경...
”사고 났다. “
”어?????? “
”사고가 좀 크게 났는데? “
남편의 전화 내용은, 차 사고가 났고 본인은 '에어팩'이 터져 많이 안 다쳤는 것 같은데, 상대방은 심각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시댁에 전화하고, ‘아일 업고’ 남편이 입원한 병원에 뛰어갔다.
사고는 전방 충돌로 남편의 차가 중앙선을 넘어가서 생겼다. 남편의 suv차량이 상대편 ‘아반떼’ 차량을 타고 올라갔다. 그래서 상대방 운전자는 후유 장애가 남을 거라는 진단과 조수석의 여자분은 몇 주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사망하셨다.
여자분이 사망하시자 경찰차가 집 앞으로 왔다. 당시 10대 중과실에 해당한 남편은 바로 호송당했고 나는 아이 업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가 3살 무렵, 아이 아빠가' 대구구치소'로 수감되었다.
계속되는 재판과, 합의를 위한 병원 행..........
당연히 상대방의 억울하고 비통한 심정의 분출구는 남편의 아내인 내 몫이었다. 그렇게 '빌고 사과'하며 죄인이 된다 한들.. 그 마음이 어찌 풀리겠는가???
시댁과 함께 있는 것을 모조리 받쳐 상대방이 원하는 남편 합의금을 마련하고, 남편은 '과실치사'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두부를 열심히 먹고, 돌아온 남편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다.
”두란노 아버지 학교“를 가고, 나에게 ‘손찌검 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적어줬다.
'아버지 학교 졸업식'에서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포옹하며 "앞으로 잘 살아보세~ "하고 외쳤으니 그때까지 ‘사람 잘 안 변한다’ ,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이야기를 비웃었다.
그리고 ‘입덧은 없을 거야’라는 시할머니의 말씀을 믿으며 둘째를 가졌다.
그런데.. 왠 걸?? 큰아이 입덧보다 더욱 업그레이드된 입덧은 이내 링거줄을 6개월 때까지 꼽고 있게 만들었다.
좀 괜찮으면 집으로 오고, 다 죽어 가면 병원 가서 링거 맞길 반복했다.
‘관성의 법칙’인지, ‘중력의 효과’인지, ‘남자들 군대 갔다 와서 효자 노릇 3개월이면 끝난다'라고 했던 그것이 맞는 말인지, '아버지 학교의 효과'는 몇 개월 가지 않았고, 나는 남편의 거친 말투에 불안해하며 입덧조차 시원하게 뱉어내질 못했다.
이렇게 이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날도 어김없이 잠이 들기 위해 혼자 애를 썼다. 잠을 자면 속이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살며시 눈을 떴는데, 큰 아이가 '장난감 카트'를 가지고 그 안에 전날 남편이 먹다 남은 ‘치킨무 통’을 넣어 끌고 다니고 있었다.(당시에는 입덧이 심해 밥을 하지 못했고 아이 밥 챙겨줄 사람도 곁에 없었다.)
”후니 뭐해? “
”....... 이거 머거 “
그 순간, 그날 남편이 중앙선을 넘어갔던 것과... 상대방 두부부에 대한 생각과... 합의하며 무릎 꿇고 빌었던 나에 대한 것과... 잠깐 변한 남편을 믿은 것과.. 입덧 안 한다고 둘째 낳기를 기대했던 시댁과... 친정부모님께 도움 청하지 못하는 나의 수치심과... 전날 저녁 대신 치킨을 혼자 뜯으며 신 것을 싫어해 ‘치킨무’는 먹지 않은 남편과... 아이 밥을 챙겨줄 이 하나 없는 나의 처지와.. 무엇보다 아들 ‘후니’가 더 힘들고 아팠을 거란 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