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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거시기 (25)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권대웅

by 최병석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 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 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 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 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그 문장을 읽는 들판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었다

하늘 허공 한쪽이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져내렸다

주르륵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생은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 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시집<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권대웅/문학동네


♡시를 들여다 보다가


성경에 우리인생이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다.요즘은 90이나 백수를 능가하는 청춘들이 속된말로천지삐까리다. 말 그대로 100세시대로 봐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런 시대의 한 가운데에 살고있자니 환갑나이는 아직 앳된 청년일 뿐이다.

그런 앳된 청년일 뿐인 나도 지나온 삶을 <문득>돌아보니

시인처럼<우두커니><멍하니><물끄러미>쳐다만 보다가

<정처없이>새롭게 느껴지는 세상을 <와락>끌어 안으며 울게되는 경우가 태반이다.혹시 신께서 우리에게 나이라는

선물을 하사하시며 후반기로 갈수록 울게 만드는 <눈물폭탄>을 낑겨넣기 하신 건 아닐까?예쁜 꽃들을 봐도 눈물,찬란한 햇빛을 대하면서도 눈물,새파란 하늘 가운데 속해있어도 눈물,눈물,눈물이다.이런게 다 시인의 <찰나>적 느낌 속에서 계산되고 그 계산된 결과치가 눈물이라는 정답지로 또르르 흘러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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