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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이런고야 (7)

월급봉투와 지우개

by 최병석

두둑한 수고가 땀과 시간으로 만들어 낸 지폐로 채워졌다. 투박한 종이봉투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한 달의 결과치가 뿌듯하게 가슴으로 전해진다.

"자, 우리 오늘 월급 받았으니 한 잔 해야쥐?"

"여보! 나 오늘 월급 받았는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딸! 아빠 오늘 월급 받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적어도 위세라도 떨 수는 있었다.


귀하의 급여가 통장으로 입금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멜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 숫자 지우기에 최적화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 첫 번째 단계로 세금만큼의 숫자가 지워집니다.

3. 두 번째 단계로 공과금이 지우개를 덧입었습니다.

4. 세 번째 단계로 귀하께서 그어 놓으셨던 외상장부의 목록들이 달려들어 걸맞은 숫자들을 집어 먹었습니다.

5. 네 번째 단계로 귀하께서 빌려 가셨던 돈의 반납을 호시탐탐 노리던 은행들의 조사가 시작되고 이자를 곁들인 만찬의 장이 시작됩니다.

6. 다섯 번째 단계로 아이들의 미래라는 교육비를 짊어진 신박한 학원장들의 운행이 그 뒤를 따릅니다.

7. 여섯 번째 단계로 지울 수 있는 숫자에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8. 일곱 번째 단계로 추가되는 숫자 지우기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비된 <마통>을 가동해야 되겠다는 알람이 켜집니다.

9. 아홉 번째 단계로 마이너스가 붙은 채 이자를 덧입은 행동대원이 활짝 웃으며 <나도 지우개>를 외칩니다.

10. 열 번째 단계로 이제 지울 것이 없으니 지우기의 최적화를 위해 다시 한 달 동안 노력해야 한다는 알람이 뜹니다.


나는 분명 한 달 동안 일을 했고 월급도 수령한 상태였는데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결과가 지워졌고 지우개 똥이 치워지기도 전에 다시 마이너스다. 내가 일한 흔적도

눈에 뵈지를 않으니 결국 온라인 속에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순리?


월급봉투가 있을 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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