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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이런고야 (8)

서커스

by 최병석

사는 게 아슬아슬하다. 살아내기 전이라 함은 관중들을 동원하기 위해 앞뒤로 <자극적인 카피글>로 무장한 간판을 뒤집어쓴 채 발길질로 큰 북을 때려대며 양손으로는 그럴싸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일이 순탄할지 혹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지켜보는 일이 즐거운 걸까? 어릴 적엔 동네에 제법 널찍한 공터라도 보이면 한 무리의 서커스단원들이 몰려왔었다. 커다란 천막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쑈가 입장료를 대신하여 무한한 상상으로 이어지곤 했었다. 그러다 확성기로 쏟아지는 궁금함의 도가 그 크기를 넘어서기라도 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쥐가 되어 구멍을 찾게 되고 쥐새끼를 찾는 고양이에 덜컥 목덜미를 물린 채 무서운 아버지 앞으로 끌려나가기 일쑤였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후라야 정신이 번쩍 났지만 그만큼 서커스의 공연은 호기심덩어리였다.

지금이야 살짝만 눈을 돌리면 볼 것투성이다. 서커스의 공연이 무색한 상상이 숱하게 준비되어 있다.

그러한 상상력에 이제 AI까지 가세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백주 대낮에 AI의 묘기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빠르고 정확하며 실수가 없는 행위를 위해

끊임없는 학습기회를 부여하는 서커스조련사?


아니 정작에는 조련사가 아니고 그 완벽한 쇼에 넋을 빼앗긴 채 살펴보다가 목덜미를 잡힌 채 무서운 아버지 앞에 끌려나가야만 되는 쥐새끼의 꼴이 되는 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지상최대의 서커스는 없을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보다 더욱 자극적이며 화려한 상상들이 AI라는 새로운 영역을 통해

마술처럼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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