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생각한 것들
장마가 길어지면 아무래도 뚜벅이는 힘들다. 특히 올 장마는 더욱 변덕스럽게 일기예보를 비껴가며 비가 오고 있어서 배로 길고 힘들게 느껴진다.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어간다고 얘기해 왔으나, 지금 날씨는 정말 동남아시아의 우기를 똑 닮았다.
밖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으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혼자 살다 보니 가족들 생각이 난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지도 10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작은 나라이고 전 국토가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지만 남쪽 끝까지 다녀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 해마다 부모님 댁에 몇 번 다녀가지 못한 지도 10년은 족히 넘었겠다.
나는 어릴 적 이사를 많이 다녔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결혼 후 직장을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셨고, 그때마다 우리 가족의 터전도 바뀌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이를 지나면서는 타지로 이사하며 친구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으나, 몇 차례 상황이 반복되자 나도 적응하여 마음의 요동이 작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너무 어린 나였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이사를 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 전학은 다니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던 시절, '우리 학교'에 대한 애정은 많았으나 '우리 동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에 진학하며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을 인사치레처럼 듣기 시작했다. 같은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던 고등학교 때까지는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부모님 댁이 어딨는지를 물었다면 답이 정해져 있었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어느 정도 내 판단이 필요한 대답이었다. 시, 군 기준으로만 해도 네 군데 이상 살아왔었다. 질문을 들을 때마다 몇몇 지명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내 습관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곳을 얘기하게 되었다. 긴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수년간 같은 지역에 살았으니 고향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부모님 댁을 찾으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서울이나 대도시에 사는 경우가 많아 집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간혹 명절 때는 동창들 만날 일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대학시절을 보낸 서울이, 안암동이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인으로서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곳은 안암동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간혹 고향, 출신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속시원히 대답하지 못하고 '부모님 댁은 어디에 있다'는 식으로 에둘러 넘어가곤 했다.
장맛비 소리 틈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우리 서울로 이사 가려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되물었다. 올해 은퇴하시면서 아들딸 모두 서울에 살고 있으니, 이 참에 두 분 서울에 살아보자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비 그치고 명절 돌아오기 전에 곧바로 움직이시겠단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좋았다. 지하철 타고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는 세상은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다만, 앞으로 나는 다시 남쪽으로 향할 일이 없을지 모른다.
길고 긴 장마가 지나면 이제 나의 고향은 정말 없어진다. 명절에는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할 것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나는 다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당신은 무진 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무진기행, 김승옥]
20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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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아서 생각한 것들 || '걸으며 생각한 것들' 사이 쉬어가는 편. 인생은 눕기와 서기 사이에 있는 앉기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걷지 않을 때는 앉아서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