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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sar Sep 15. 2024

여의도, 나의 올드스타

여의도 | 걸으며 생각한 것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ㅇㅇ호

90년대에는 TV프로그램, 라디오, 잡지, 신문 등 가리지 않고 제작진으로 엽서를 보내는 주소가 있었다. 매번 TV,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약속한 듯 나오던 그 문장. 서울이 어디쯤 있는지도 잘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저 문장만큼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되었다. 서울'특별'시가 너무 특별한 곳으로 느껴져서, ‘여의도동’이라는 말이 왠지 귀여워서 혼자 버릇처럼 따라 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나에게 처음 인식된 서울은 여의도였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밈이 되어 남아있는 무한도전이라는 전설적 TV프로그램에는 유독 여의도가 배경으로 많이 나왔다. 우리 세대에게 무한도전은 단순한 TV 프로그램 그 이상이었다. 매회 외워질 정도로 재방송을 보다 보니 가보지도 못한 여의도 방송가와 공원, 주택가가 마치 이웃처럼 친숙해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서울 하면 여의도 풍경이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유독 여의도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많던 TV프로그램, 무한도전


마침내 약관의 대학생으로 상경하여 바라본 서울은 모든 것이 재밌고 새로웠다. 어느 주말, 서울에서 같이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고등학교 동창 2명과 ‘서울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따로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여정도 아니었지만 동대문, 청계천, 남산을 돌아 마지막에는 거짓말같이 여의도로 향했다. 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골목도 돌아보며, 비로소 서울에 살게 됐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나 수십 년간 서울을 떠올리면 63빌딩이 상징적이었다. 우리나라에도 63빌딩 같은 건물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했을 때가 있었다. 비단 63빌딩 뿐 아니라 여의도는 그 자체가 7~90년대 대한민국 발전의 표상이었다. 정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여의도 금융가가 대표적이고, 현재 K-콘텐츠의 모태가 된 우리나라 방송산업의 본산으로 오랜 기간 임해왔다.


여의도와 관련된 키워드는 그뿐 아니다. 누군가는 윤중로 벚꽃길의 추억으로, 매년 돌아오는 불꽃축제의 화려함으로, 한강공원 피크닉의 따뜻함으로 기억하는 곳이 여의도다. 어느덧 나도 서울살이 여러 해를 지나며 여의도에 대한 추억이 제법 쌓였다. 마라톤을 달리고, 또 집회에 참석하고, 뜻 없이 따릉이를 타고 한강공원에 나서던 기억이 난다.


한때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면 창밖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한강, 그리고 여의도에 우뚝한 63빌딩을 바라보면 잠시 지하철에 탄 것을 잊었다. 붐비는 사람들 틈으로 물멍을 즐기며 서울을 만끽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지났다. 그런 나도 이제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 화면을 본다. 더는 창밖의 63빌딩이 특별하지 않다.


실제로 여의도를 대변하던 63빌딩은 더 이상 서울 전체에서도 높은 건물이 아니고, 그 많던 방송국은 상암동으로 하나둘씩 자리를 옮겼다. 국회의사당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서울 각지로 여의도의 중심축이 옮겨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제 여의도는 오히려 여가공간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젊은 세대는 여의도에 대한 이미지로 더현대를 떠올린다. 연예인을 보고 공연을 보러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쇼핑을 하고 공원에서 유유히 휴식을 즐기는 곳이다.


최근 방문한 여의도에서는 옛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키가 작은 복도식 아파트, 그리고 이제는 보기 힘든 아파트 앞 큰 상가. 영화 [라디오스타]의 박중훈과 안성기가 생각났다. 왕년의 스타로 최고의 자리에서는 내려왔지만, 또 그만의 잔잔한 매력을 가지고 재기하는 천방지축 주인공. 한때 서울의 한복판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스포트라이트를 내어주고 서울 시민의 안식처가 된 여의도의 모습을 보았다.


영화 라디오스타 (2006)


매 주말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는 일반인들이 펼치는 노래 공연이 이어진다. 노래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이 코인노래방에서 공들인 실력을 발휘한다. 이들은 강을 등지고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마치고 내려오면 타인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들어준다. 이제 여의도에서 연예인 보기는 힘들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스타를 만날 수 있다. 여의도에는 새로운 상징성이 생겼다.



[여의도]

https://www.google.com/maps/d/u/1/edit?mid=11LqrbR3Ume_g5x2fKB_5JStkGytUAnI&usp=sharing


여의도는 갈 곳이 참 많다. 섬 안에 빈 공간 없이 이곳저곳이 모여있기에 걸어서 이동하는 것에도 큰 무리가 없다. 더현대와 여의도공원이 있는 중심지도 갈 곳이 많지만, 한적한 곳이 좋다면 아무래도 외곽이 더 좋다. 여의도의 복판을 지나는 여의도공원과 한강공원을 차치하고라도 여의도는 걷기 좋은 동네다.


여의도 동쪽은 주택가라고 할 수 있다. 국회의사당과 윤중로가 있는 섬 서쪽과 고층빌딩이 늘어선 중심부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오랜 시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구축 아파트가 줄을 서 있고, 외부 사람들의 왕래도 많지 않다. 샛강역으로 나와 63빌딩 방면으로 이어지는 이 동네는 특별하진 않지만 조용한 맛이 있다.


샛강역 3번출구로 나오면 바로 작은 공원이 보인다. 인근 주민들이 산책과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는 공원을 지나면 여의도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가다가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여의도성모병원을 지나 63빌딩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주택가를 걸을 수 있고, 그대로 외곽으로 돌면 63빌딩을 뒤로 크게 돌아가는 길을 걷게 된다. 


샛강역 앞 자매근린공원
여의도성모병원 앞 교차로. 잘 뻗은 도로가 한강공원까지 이어진다.


이곳 주택가를 걸으면 8~90년대 아파트 단지 풍경을 볼 수 있다. 아파트 앞 상가에는 작은 음식점부터 카페, 치과, 학원, 목욕탕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요새 지어진 주상복합이나 대형 아파트단지와 달리 작은 담벼락 하나만 사이에 두고 길가에서 바라보이는 상가 모습들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63빌딩과 한강이 보인다. 63빌딩 앞으로 한강공원으로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있다. 한강 아래로 내려가면 상대적으로 한적한 한강공원 외곽이 나오게 된다. 붐비는 주말에도 이 근처는 상대적으로 한가하기 때문에 조용한 곳이 좋다면 이곳에 돗자리를 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강 오리배


원효대교 아래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꿀 같은 휴식을 즐긴다. 시간대를 잘 맞추면 동네스타들의 무료 공연도 관람 가능하다. 편한 피크닉의자와 맥주 한 캔이면 이곳이 바로 야외 콘서트장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강공원 중심부가 나오고 넓은 공터와 분수대 등 멋진 조경을 만끽할 수 있다.


원효대교에서 벌어지는 일반인 공연


한강을 등지고 나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재밌다.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 여의도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아무래도 주변 식당이 직장인 위주이다 보니 주말에는 잘 열지 않는다. 식사까지 생각한다면 영업시간을 미리 파악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2024.09

© Quasar


|| 걸으며 생각한 것들 || 걷기와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걸으면 생각이 차오르고, 달리면 생각이 비워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걸으며 생각한 것들, 그리고 산책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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