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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sar May 27. 2024

낮의 강남역, 밤의 강남역

강남역 | 걸으며 생각한 것들



    친구 결혼식이 있어 오랜만에 강남역에 방문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강남역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여전했다. 거리의 상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곳이지만 그 분위기만은 십 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는다.


    본디 서울 출신이 아니었던 나는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강남역에 갈 일이 많지 않았다. 간혹 약속이 있어 방문한 강남역은 항상 붐비고, 시끄럽고, 결정적으로 물가가 너무 비싼 탓에 제 발로 가기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홍대나 이태원처럼 특별한 컨텐츠가 없다고 느껴져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중요한 날(?) 기분 내러 가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왜 강남역이 그토록 인기 많은 곳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서울-경기권 각지에 흩어져있는 친구들의 약속장소로 가장 타협이 쉬운 곳이 바로 강남역이었다. 돈보다는 시간이 아쉬워지는 시절이었기에, 조금 비싸더라도 강남역에서 그렇게 수많은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한참 동안 나에게 강남역은 '밤의 강남역'이었다.


    그러다 인생의 또 다른 파도에 휩쓸려 강남역에 있는 학원에서 1년 정도 공부를 하게 되면서 '낮의 강남역'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할 때면 흰 와이셔츠에 타이를 맨 샐러리맨들과 단어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수험생들을 볼 수 있었다. 대형 토익학원에서는 낮에 스터디 장소로 술집을 대관하여 운영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강남역은 서울의 축소판, 한국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지하철역을 나서면 출구마다 노숙인들이 보이고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고층 빌딩과 고급 아파트가 보이는 곳이 강남역이었다. 전쟁의 상흔 위로 경쟁하듯 높게 지어진 건물들과 그 아래 개미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입시학원 앞에 모텔이 있고, 그 앞으로 성형외과가 있고, 대기업이 있고, 동태탕 집이 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오묘한 불협화음이 서울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어스름 지는 저녁시간, 홀로 높은 학원 건물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회식자리의 기름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런 날이면 내가 거리에 섞이지 못하고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있지만 다른 세상에 있는 저들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밤은 항상 짧았고, 낮은 야속하게 길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지독한 이 사회의 한 조각이 되었고, 강남역은 다시 '밤의 강남역'이 되었다. 왜인지 이전만큼은 강남역으로 발이 잘 닿지 않는다. 강남역 주변으로 약속을 잡을 때면 신논현 넘어 영동시장으로 가거나, 역삼역 뒷골목으로 돌아간다. 강남역에 점점 놀만한 곳이 없어지는 건지 괜히 사람 붐비는 것이 싫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해 파이브가이즈가 강남역에서 첫 선을 보였고, 11번 출구 강남스타일 조형물 앞에는 여전히 말춤을 따라 하는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 강남 파워가 아직 죽지 않았나 보다. 내게 서울을 소개하라면, 첫 번째로 강남역을 소개하겠다. 강남역은 아직 유효하다.



https://www.google.com/maps/d/u/5/edit?mid=1s2scHH27dtH1Ata7GlaXrMe0mYV96Vg&usp=sharing


    여름철 폭우가 오면 강남역 일대가 모두 물에 잠긴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강남역이 주변보다 지대가 낮아서 그렇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다. 특히 서쪽(11번 출구, 역삼역 방향)으로 가면 난데없이 오르막을 만나 낭패를 보기 쉽다. 교대역 방향은 언덕은 아니지만 산책을 즐기기에는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든다.


    강남역에도 다들 모르는 숨겨진 녹지가 있다. 우리나라 태권도의 산실인 국기원 근방이 그곳인데, 강남역에서 충분히 도보로 접근 가능한 위치에 있다. 특히 국기원 아래로 자리한 역삼문화공원에 있다 보면 강남역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이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오르막길을 조금 걸어야 한다.


    역삼문화공원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11번 출구에서 골목길로 곧장 들어가 먹자골목 안쪽으로 약간만 올라가면 바로 역삼문화공원이 나온다. '강남역에 이런 곳이 있었어?' 하는 생각이 들 만한 정도 크기의 공원이고 벤치와 운동기구도 있어 잠시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역삼문화공원을 즐기고 나서는 공원을 끼고 돌아서 비교적 한적한 골목으로 산책을 이어가는 것도 방법이고, 아니면 국기원으로 올라가 보는 것도 가능하다. 국기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공원 뒤쪽에 있고, 국립청소년어린이도서관 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어도 국기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역삼문화공원 아래쪽에서 국기원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국기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원으로 볼 수도 있어 산책하기에 좋고, 실제로 주변을 둘러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기도 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국기원 입구로 나오면 테헤란로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데 그 길목에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등 다른 구경거리도 있다.

국기원 입구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11번 출구에서 CGV 쪽으로도 크게 돌아서도 역삼문화공원에 다다를 수 있다. 이 길에는 사람이 정말 많지만 오르막길을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재밌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귀여운 카페들이 나타나고, 고요한 길거리의 주택들이 나타나게 되므로 새로운 느낌의 강남역이 궁금하다면 이쪽 골목으로도 올라가 볼 수 있겠다.




2024.05

© Quasar


|| 걸으며 생각한 것들 || 걷기와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걸으면 생각이 차오르고, 달리면 생각이 비워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걸으며 생각한 것들, 그리고 산책로를 소개합니다. 직접 걸어본 곳만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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