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수 | 걸으며 생각한 것들
바야흐로 여름이다. 어느새 한낮에는 조금만 걸어도 등에 땀이 흐르고,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밖을 나서게 된다. 주변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개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여름을 더 좋아한다. 여름날의 가벼운 옷차림이 좋고 푸른 나무와 그늘이 좋다. 여름을 생각하면 한옥 대청마루에 누워 부채를 부치며 마당을 바라보는 모습이 떠올려진다. 실제로 한옥에 살아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도시가 좋아 서울에 살고 있지만, 쉴 때면 조금이라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석촌역 부근에서 6년을 살며 가장 좋았던 것은 석촌호수였다. 석촌호수는 나에게 산책로이면서도 러닝트랙이자 공연장이었다. 선선한 저녁날이면 석촌호수를 한 바퀴 산책하고 마음이 닿으면 근처 롯데몰까지 올라가 구경을 하거나 영화를 보았다. 이미 시계가 한밤중을 가리킬 때, 영화를 보고 나오면 호수에 떠 있는 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버스킹 공연에 박수를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러닝을 취미로 시작하면서 석촌호수는 내가 가장 많이 이용한 러닝 코스가 되기도 했다. 호수는 늦은 저녁까지도 항상 사람이 많은 명소였기에 러닝을 하는 시간도 주로 인적이 드문 한밤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석촌호수는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벚꽃축제가 열리는 봄의 호수로, 축제 기간 일주일은 호수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된다.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걸어 다니는 오리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수풀이 우거지고 초록빛의 그림자가 보이는 여름의 호수를 가장 좋아한다.
살다 보면 간혹 냄새나 소리만으로 깊게 묻혀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여름밤의 석촌호수를 걷다 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다. 내 모교는 지방에서도 교외의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밤이면 사방이 깜깜해서 별이 보이고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그런 곳이었다. 8 자 모양의 호수를 따라 걸으면 야간 자율학습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걷던 기억이 떠오른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운동장을 뱅뱅 돌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별 것도 아닌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이제는 그때보다 나이를 2배는 더 먹었으니 시간이 흘러도 너무 흘렀다. 더 이상 고향에 살고 있지도 않고, 그 시절 같이 웃던 친구들도 각자의 사정으로 가끔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래도 호수를 걸으면 그때 친구들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다.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선생님은 건강하신지, 이제는 흰머리도 많이 나셨겠다 생각하다 보면 조금은 수줍고 막연한 꿈이 있던 그 시절 내 모습도 같이 떠올리게 된다.
또 여름밤 산책을 하게 되면, 석촌호수를 걸으며 젊은 날을 고민하던 내가 다시 떠오를지 모르겠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정의롭고 용감하던, 스스로에게 치열하던 내 아름다운 시절이 호수에 담겨있다.
[석촌호수]
https://www.google.com/maps/d/u/5/edit?mid=15miBpEUgWfxsWea1R4Gk7QEX-HlUsRk&usp=sharing
이제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인 석촌호수를 소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 안 가본 사람이 없을 텐데. 그래도 동네주민으로 느꼈던 디테일을 남겨보려 한다. 더불어 석촌호수까지 가는 길도 같이 소개해 본다.
석촌호수는 특이하게 누운 8 자, 조랭이떡 모양의 호수이다. 그 특성 때문에 동호와 서호의 분위기도 다르다. 동호는 너무도 유명한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가 수십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으로, 놀이공원을 중심으로 좀 더 동화적인 느낌이 들고, 서호는 롯데월드 타워가 마주 보이며 도시적이고 좀 더 관광지로서 세련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동네 주민들은 동호 쪽에 많이 있고, 서호 쪽에는 놀러 온 관광객들이 많은 느낌이다. 러버덕, 피카츄와 같은 거대 인형들이 둥둥 떠있는 곳도 서호이다.
호수 맞은편 길가 풍경도 약간 차이가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많은 동호 쪽에는 고깃집, 치킨집, 작은 카페 등 여러 상가가 자리한 느낌이라면, 서호 쪽은 분위기 있는 와인바, 큰 카페가 있어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경험상 석촌호수를 외부에서 찾아오려면 버스는 조금 불편하다. 지하철에서 걸어서 찾아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에서 찾아가는 방법 3가지를 소개해본다.
1. 잠실역 출발
잠실역 2번 출구로 나오면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다. 대부분 호수로 놀러 오는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할 것이고, 실제로 가깝기도 하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롯데타워를 끼고돌면 호수로 바로 내려갈 수 있다. 보통 롯데타워-월드몰 앞마당에서는 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말에는) 구경을 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월드몰 앞마당 방향에서 바로 호수로 내려가면 야외 테라스를 즐길 수 있는 카페 JBOUT이 있고, 왼쪽으로는 공연장과 더불어 러버덕을 비롯한 거대동물들 출현지를 만난다.
2. 석촌역 출발
1번 출구 또는 8번 출구 쪽에서 나와서 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쭉 뻗은 넓은 차도와 인도, 자전거 도로까지 괜히 속이 뻥 뚫리고 기분이 좋다. 조금 더 들어가면 송리단길도 있다. 유명세에 비해서는 크기도 작고 볼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데이트 코스로 생각한다면 송리단길 맛집을 들렀다가 서호 맞은편 와인바도 가고 석촌호수를 돌아도 좋다.
3. 석촌고분역 출발
석촌고분역은 9호선에서도 급행역에 속하지 않고 주변도 조용한 편이라 많이들 방문하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동네 주민들이 많은 곳답게 맛집도 있고 아기자기한 카페도 있는 편이다. 우선 '성시경의 먹을텐데'에 나왔던 주은감자탕이 있고, 서울 3대 순대국(?)으로도 불리는 청와옥 본점, 매운 음식 땡길 때마다 생각나는 군산오징어가 있다. 이 외에 호수 맞은편으로도 가볼 만한 맛집이 꽤 있다. 석촌고분역에서 출발해서 호수로 들어서면 바로 운동기구가 있다. 주민들이 나와서 운동도 많이 하고, 호수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러닝크루도 이곳에서 모임을 많이 가진다.
2024.06
© Quasar
|| 걸으며 생각한 것들 || 걷기와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걸으면 생각이 차오르고, 달리면 생각이 비워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걸으며 생각한 것들, 그리고 산책로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