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드러난 진심
[지난 줄거리]
아르델 왕국에 납치된 백설은 자신을 샤를 남작의 딸 헤이온이라고 속인다. 윌리엄 왕자는 국왕에게 백설을 이용해서 피오나 왕국과 이븐 왕국을 압박해 보이겠다고 사신단 파견의 허락을 구한다.
이븐 왕국은 백설 공주의 혼사를 앞당기자는 신하들의 입김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왕비는 공주의 병환을 들어 시간을 벌어보려 하지만 오히려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피오나 왕국은 아르델 왕국에서 사신을 보내겠다는 서신을 받고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백설이 납치된 날 자취를 감추었던 시리우스는 자신의 나라 피오나 왕국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8화 : 드러난 진심
—
“누나, 백설이 잡혀갔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시리우스는 피오나 공주와 국왕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븐 왕국의 백설 공주가 네 옷을 입고 있다가 잡혀갔다는 말이냐?”
“장난 삼아 가끔 제 옷을 입곤 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리라고는…”
피오나 국왕은 잠시 눈을 감고 사태의 심각성을 가늠했다.
아르델 왕국에서 붙잡고 있는 게 피오나 왕국의 왕자가 아님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서신을 보낸 것은 그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피오나 왕국의 후계 구도를 점쳐보기 위함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이븐 왕국의 발목을 붙잡은 게 10년도 넘은 일이다. 아르델 왕국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있던 피오나 왕국에는 군사적 동맹을 맺어 정복전쟁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피오나 국왕은 애써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고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시리우스가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왕이 되길 원했지만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델 왕국에서 사신단이 도착하기까지 적잖이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때까지 어떻게 대처할지 대안을 강구해 보도록 하자꾸나.”
국왕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피오나 왕국 성에는 드넓게 펼쳐진 자작나무 숲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가 있다. 답답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시리우스도 피오나도 이곳에 와서 길게 뻗은 자작나무 숲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간 쌓아두었던 이야기가 많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아는 척 안 해서 많이 서운했지?”
“괜찮아. 애초에 너가 진 짐이 가볍지 않았잖아. 힘들어하는 널 모른 채 하고 있었고 너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시리우스는 통나무 집에 있을 때 피오나를 외면했던 일을 꺼냈다. 피오나는 나라를 등지고 도망칠 때까지 동생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미안함을 전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나누며 잠시 동안 말없이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그때 시리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백설이 잘못되면 .. 어쩌지?”
“백설은 강한 아이야. 죽으려고 했던 나도 살렸는걸”
“누나를 살렸다니 그게 … 무슨 소리야?”
피오나는 한껏 긴장한 시리우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지난날 세상을 등지고 낭떠러지 앞에 섰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너가 그렇게 나가고 아버지께서 정략결혼처를 알아보셨거든. 정략결혼이라고 하는 게 어릴 때 정해지는 경우가 많고 늦어도 열 살 되기 전에 끝나잖아. 열다섯이 넘은 내가 혼처를 찾기란 쉽지 않았지. 그런데 남쪽에 샤론 왕국 왕자가 아직 혼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어.”
시리우스가 떠나고 정략결혼에 내몰렸던 피오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혼처를 찾아 헤매는 일이었다.
샤론 왕국은 강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지리적으로 피오나 왕국과 그리 멀지 않았고 양국 간의 힘의 균형을 생각해 볼 때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샤론 왕국의 왕자가 피오나 공주를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을 앞으로 몇 번을 더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지 뭐야.. 그래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
마침 눈앞에 낭떠러지가 보이는 거야.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그저 앞으로 마냥 걸었어.
그때 백설이가 나타난 거야. 글쎄, 그때 백설이가 내게 어떤 말을 했는 줄 알아?”
“어떤 말?”
“토끼는 자기가 싼 똥을 다시 먹는대. 왜 그런 줄 알아?”
“뭐라고…?”
시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동생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인지 놀랍고 감격스러워 피오나도 덩달아 크게 웃었다.
“그렇지? 죽겠다고 덤벼드는 사람한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져서 목숨을 구한 아이야. 백설이는.. 그니까 괜찮아. 분명히 어떤 상황을 만나도 이겨낼 거야. 그 아이라면.”
“근데… 토끼는 왜 자기가 싼 똥을 먹는 건데?”
“궁금해? 나중에 만나서 직접 물어봐!”
시리우스는 백설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슴 한쪽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피오나는 동생의 표정을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
아르덴 왕국은 윌리엄 왕자의 타국 방문 일정 준비로 부산했다. 백설은 윌리엄 왕자의 침소에 끌려가 있었다.
“이봐, 헤이온 너 말이야. 정말 백설 공주라는 애 본 적 없느냐? 소문으로는 엄청 미인이라고 들었다만…”
“제가 통나무 집을 자주 드나든 게 아니라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들고나는 곳이라 이름을 다 알지는 못하옵니다.”
“시시하긴.. 뭐, 조만간 볼 것 같으니 고건 접어 두자꾸나.. 근데 너 말이다. 올해 나이가 열다섯이라고 했나? 혼처는 정해졌느냐?”
“아.. 아직..”
윌리엄 왕자는 백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턱을 올려 백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백설은 깜짝 놀라 윌리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계속 돌렸다.
“참.. 얼굴이 이래 가지고 서야.. 혼사는 어렵지 않겠느냐? 열다섯에 반응이 없는 거면…그런데 못생긴 주제에 보면 볼수록 재밌는 얼굴이란 말이지… 정 못 구하면 이 몸이 거두어주련?”
윌리엄은 점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말씀하신 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윌리엄 왕자는 싱거운 표정을 짓더니 손에 쥐었던 백설의 얼굴을 휙 제치고는 말했다.
“지난번에 잡혀올 때 입었던 옷이 엉망으로 망가졌길래 똑같은 옷으로 준비했다. 여봐라, 가서 저 계집에게 옷을 입히고 최대한 왕자처럼 치장을 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라. 내일 아침 날 밝은 대로 출발할 것이다.”
아르델 왕국의 시녀들이 달라붙어 백설의 몸단장을 했다. 먼발치에서 윌리엄은 백설이 왕자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숨긴다고는 했지만 거울을 끼고 앉았던 백설에게 서성이는 왕자의 모습이 슬쩍 비쳐 보였다.
백설은 치장을 마치고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통나무 집에 있는 친구들이 혹시나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을지 왕비가 큰일을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든 무사히 여길 빠져나가야만 했다. 꾸벅꾸벅 졸면서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밖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눈을 떠 보시게.. “
백설은 순간 깜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백설의 눈앞에는 낯선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