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3년 전
[지난 줄거리]
윌리엄은 침소에 끌려간 백설에게 잠이 들 때까지 함께 있어달라고 했다. 같이 있으면서 각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백설과 정략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사신단을 도망쳐 이븐 왕국에 서신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통나무 집의 여섯 친구들은 백설을 구하려고 아르델 사신단보다 먼저 피오나 왕국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12화 :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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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았느냐?”
“네, 이븐 왕국에는 샤를이라는 이름의 남작이 없다고 하옵니다. 그 계집이 분명 거짓을 말한 게 틀림없사옵니다.”
“윌리엄 네 놈이 끝까지 나를 …”
아르델 국왕의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나랏일이라면 강 건너 불구경하던 녀석이 갑자기 사신단이니 뭐니 떠드는 것부터가 이상해 줄곧 윌리엄을 감시해 온 터였다.
아르델 국왕은 야심가였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여 그 위에 군림하길 원했다. 일개 왕자가 일을 그르치는 일 따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첫 단추는 이븐 왕국을 차지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이븐 왕국은 군사력이 약했다. 상비군의 전투 능력도 한참 미진해 북방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산적으로부터 자주 침입받았다. 그때마다 아르델 왕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보내 이븐 왕국을 도와주었다. 이븐 왕국의 국왕은 아르델 왕국의 호의에 큰 감사를 표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상하게도 이븐 왕국을 침입하는 산적이나 이민족의 수가 늘어났다. 반복되는 전쟁에 이븐 왕국의 군사력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갔고 그 자리를 아르델 왕국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채우고 있었다.
아르델 국왕의 첫째 아들 윌리엄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븐 왕국의 왕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왕은 이를 놓치지 않고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이븐 왕국에서도 이 제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븐 왕국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나라 사이에 정략결혼이 맺어졌고 윌리엄이 열여덟 백설이 열여섯이 되는 해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 계집이 윌리엄을 흔들어 놓지만 않았어도… 아직도 행방은 못 찾았느냐?”
“그게… 당시에 성에서 쫓겨나 아르델 왕국을 떴다고는 하던데.. 그 이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아는 자가 없사옵니다.”
아르델 국왕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첫째 아들 윌리엄, 2년 뒤에 둘째 아들 필립이 태어났다.
왕비는 두 왕자가 아직 엄마 손을 탈 어린 나이에 큰 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은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대신 당장 어미 품을 그리워할 아들에게 적당한 유모를 붙여주었다.
“유모 계집의 이름이…”
“마리아이옵니다. 뭐 어디나 있는 흔한 이름이옵지요. 고 계집이 그렇게 윌리엄 왕자님을 홀릴 줄이야.. ”
윌리엄이 일곱 살 필립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왕비가 죽고 그 자리를 유모 마리아가 대신했다. 애초에 유모라면 아이들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아이 엄마를 데려다 쓰는 게 보통이었다.
허나 두 왕자가 이미 젖을 뗀 나이였기에 함께 놀아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활발하고 명랑함을 갖춘 사람이 적합했다.
막 스물이 된 마리아는 성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웃음이 많고 아이들과 잘 어울릴 줄 알았기에 두 왕자의 유모로 발탁되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윌리엄과 필립 모두 마리아를 잘 따랐다. 윌리엄은 살아생전 어머니와 함께 한 기억이 더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그랬는지 죽은 어머니의 흔적을 마리아에게 찾고 더듬으며 깊이 물들어갔다.
윌리엄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아르델 국왕은 마리아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유모의 일에서 벗어나 자유를 허락했다.
이 조치는 3년 뒤의 혼사를 앞두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마리아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윌리엄 왕자에게 국왕이 내린 경고였다.
윌리엄은 마리아가 없으면 자신은 살아갈 수 없으니 제발 성 밖으로 보내지 말라고 빌었다. 국왕은 왜 그렇게 유모에게 집착하는지 연유를 물었다.
윌리엄은 마리아를 사랑한다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대노한 국왕은 마리아를 당장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때부터였다. 윌리엄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이 나라를 벗어날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 시작했다. 아르델 국왕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윌리엄은 이븐 왕국과 정략결혼을 성사시킬 때까지는 잡아 두어야 한다...가서 필립 왕자 들라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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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침실과 연결된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서서 눈을 감고 지난날 빛바랜 기억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열세 살의 필립은 그날따라 멋지게 완성된 그림을 마리아에게 보여 줄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마리아의 처소로 달려가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는데
그곳에서 윌리엄과 마리아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윌리엄의 손은 마리아의 허리를 감싸고 마리아의 손이 윌리엄에 목에 감겨 있었다.
엄마가 아들에게 으레 하는 애정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 사랑에 이끌려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윌리엄은 언젠가 필립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략결혼 따위.. 누가 그딴 걸 만들어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안 그래 필립?”
“사랑하는 사람…?”
그날 필립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윌리엄에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아는 성 밖으로 쫓겨났고 윌리엄은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나온 윌리엄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생전 밝히지 않던 여인들을 끼고 살았고, 잠자리에 매일 밤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르델 왕국에서는 윌리엄 왕자라고 하면 여자를 밝히는 파렴치한 난봉꾼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사신단이 떠나기 전날 밤 윌리엄은 필립을 찾아왔다.
“필립, 아르델 왕국과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윌리엄은 아르델 왕국을 완전히 떠날 준비를 했다. 필립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필립 왕자님, 국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