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윌리엄의 마음
[지난 줄거리]
윌리엄은 백설이 가지고 있던 거울을 손에 넣었다. 비추어도 보이지 않는 거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더니 잠시 가지고 놀겠다며 가지고 갔다. 백설은 그 순간 윌리엄 왕자의 얼굴 속에서 슬픔을 읽는다.
피오나 왕국에서는 이제 곧 도착할 아르델 왕국의 사신에게 어떻게 맞서 대응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피오나 국왕과 피오나 공주는 거짓에는 거짓으로 맞서는 전략을 말한다.
아르델 왕국 국경 근처까지 넘어온 윌리엄 왕자는 긴 구간의 숲길을 앞두고 하룻밤을 쉬어 가기로 한다. 그날 밤 백설은 윌리엄의 침소에 끌려가게 된다.
11화 : 윌리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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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은 왕자에게 한쪽 손이 붙잡힌 채 몸의 균형을 잃는 바람에 왕자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자 윌리엄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었다.
“하하하! 무슨 오해를 하는 것이냐? 내 아무리 막무가내인 사람이라 해도 그리 경우 없는 짓을 하지는 않는다. 걱정 말거라.”
순간 긴장이 풀려 크게 한숨을 내쉬는 백설을 뒤로하고 왕자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밤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끓어 올라 금방 깨서 말이지. 그래서 성에 있을 때는 잠자리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항상 있거든. 주로 여자 시녀들이지만… 의심할 만한 그런 일은 전혀 아니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라.”
“언제부터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는지요?”
“3년 전쯤인가…”
윌리엄 왕자는 침대에 누워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냥을 나가서 노루를 잡은 일, 어릴 때 동생이랑 칼싸움을 하다가 석상을 깨뜨린 일, 공부가 하기 싫어서 성의 종탑에 숨어서 깜빡 잠들었던 일, 어린 시절의 윌리엄이 어떤 아이일지 짐작할 만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백설은 왕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헤이온, 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구나. 어릴 때 넌 어떤 아이였느냐?”
“아, 저는 보시다시피 태어날 때부터 빨간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고민이 많았사옵니다. 그래서…”
백설은 빨강 머리를 오징어 먹물로 물들였던 일, 까무잡잡한 피부를 하얗게 만들어 보겠다고 우유로 날마다 목욕을 했던 일,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지냈던 일을 들려주었다.
왕자는 백설의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어했다. 즐겁게 듣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는 이도 덩달아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갔다.
“그래서 결국 아쉽게도… 아름다워 지지 못하고 이 꼴이.. 되고 말았사옵니다.”
마무리를 너무 서글프게 맺은 것 같아 살짝 민망했다. 윌리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백설과 나란히 마주 앉았다.
“네 얼굴은 제법 너한테 잘 어울려. 적어도 나는 ... 그리 생각한다.”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백설은 왕자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왕자는 백설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이지, 백설 공주는 대체 어떤 여인일까…”
애써 돌린 이야기가 결국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문득 윌리엄의 속마음이 궁금했던 백설은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백설 공주님께서 왕자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그러면…”
“난, 백설 공주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신분을 속이고 있지만 눈앞에서 단칼에 거절당하는 말을 듣자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재빨리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아, 공주가 싫어서가 아니라 공주를 위해서 안 한다는 말이다. 오해 말아라.”
윌리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공주님이 보고 싶다 하지 않으셨는지요?”
“그야 사내가 여인의 얼굴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느냐. 뭐 당최 얼굴을 볼 수 없게 단단히 벽을 치고 있어서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겠구나.”
윌리엄 왕자는 무언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한껏 진중한 표정으로 백설을 마주했다.
“백설 공주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와 결혼이 약속된 사람이다. 그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냐.
정략결혼이 약속된 국가에서 공주를 엄격히 다룬다고 들었다. 여인의 몸으로 나라의 명운을 짊어지고 가는 셈이지. 무엇보다 상대국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과 미모를 지녀야 한다는 압박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백설은 아름다움이라는 속박에 갇혀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온 지난 세월을 위로받는 것만 같았다.
“헤이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는 피오나 왕국으로 향하는 도중 내가 틈을 주는 사이에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아르델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이븐 왕국에게 공격의 틈을 주기 위해 압박을 한 일도 통나무 집에 있는 타국의 왕자를 잡아오라 시킨 일도..”
“그렇다면 제 말에 동의를 해주셨던 것은 대체….”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무 죄도 없는 네가 죽임을 당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어차피 성 안에서 보는 눈이 많아 어떻게든 빠져나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차에 너를 살리고 나도 빠져나올 수 있는 접점을 찾은 셈이지. 허무맹랑했지만 무척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우리 국왕까지도 넘어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가 도망치면 왕자님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겠는지요?”
“다른 방법이야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생각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
왕자는 침대 아래에 손을 짚어넣어 작은 함을 꺼냈다. 그 안에서 서신을 꺼내어 백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서신을 몸에 지니고 있거라. 이것은 이븐 왕국의 왕비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내 만나본 적은 없으나 지금까지 이븐 왕국이 움직이는 동향으로 미루어 보아 왕비는 지혜롭고 용감한 분이시다. 이 서신을 받으면 그다음 일을 준비해주실 것이다. 너가 도망치는 즉시 왕비님께 이 서신을 전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백설은 말없이 윌리엄이 건넨 서신을 두 손에 받아 들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 혼자 모든 걸 감당하게 하진 않을 것이니. 밤이 늦었다. 내가 잠이 들거든 너도 침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그건 그렇고 백설 공주의 얼굴을 직접 보고 사과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 아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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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델 왕국 사신이 어제 아침 일찍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내일 해 지기 전에는 자작나무 숲에 도착할 것 같아. 우리도 슬슬 출발하자. 사신단보다 먼저 자작나무 숲에 도착해야 해.”
라오스가 하늘의 해의 위치를 가늠하며 시간을 계산해보더니 친구들에게 말을 했다. 도나우, 레아, 미뉴에트, 파울, 솔르가 라오스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누구든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발걸음부터가 굉장히 무거웠다. 답답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솔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시리우스는 잘 살고 있을까? 그 녀석.. 마음이 여리고 착해 빠져서 걱정인데 말이야..”
“맨날 백설 뒤만 쫓아다니고 그랬잖아…”
레아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랬었어? 전혀 몰랐는데..”
도나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리우스가 백설 좋아하는 거 도나우 너랑 시리우스 본인 빼고 다 알았을걸?”
솔르가 익살맞게 맞받아쳤다.
“시리우스 본인도 몰랐다는 말은 뭐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라오스가 솔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느낌이지만 시리우스 같은 애들이 자기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게 느리거든. 아마 본인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은 하는데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왜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진 거야. 사람 걱정하게?”
신경질 내며 쏘아붙이는 솔르의 말에 파울이 곰곰이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굉장히 신경 쓰였던 부분이긴 한데.. 시리우스가 어쩌면 백설이 납치된 이유를 가장 먼저 알아챘던 게 아닐까 싶어서.. 납치되었을 때 입고 있던 옷도 시리우스 옷이었고… 그래서 말인데 시리우스가 피오나 왕국의 왕자가 아닐까?”
여섯 명의 친구들은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춰 서서 서로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거네 그거! 시리우스 녀석 피오나 왕국의 왕자였구나. 이븐 왕국 공주에 피오나 왕국 왕자.. 이거 통나무 집에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랑 같이 지냈던 거구만.. 또 이웃나라 왕자 혹은 공주님 있어? 깜짝 놀라게 하지 말고 말할 거면 지금 신고해.”
솔르는 다섯 명 얼굴을 번갈아 가며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너무 장담하지는 마.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잖아. 근데 시리우스가 백설을 구하려고 통나무 집을 떠난 거라면 도대체 어떻게 구할 생각이었을까?”
솔르의 손장난을 뿌리치며 파울이 다시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미뉴에트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가 나비 잡는 걸 참 좋아했거든. 예쁜 모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만 보면 애가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거야.
한 번을 뛰는 일이 없던 시리우스가 이마가 깨져서 온 날이 있었어.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나비를 잡으러 마냥 쫓다가 발을 헛디뎌서 산비탈을 한참 굴렀다는 거야. 그런데도 아파하는 기색 없이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 게 살짝 섬뜩했거든.
그날 깨달았어. 이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엄청 무서운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거…. 그래서 만약 시리우스가 백설을 구하겠다고 빠져나간 게 맞다면…”
미뉴에트는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동시에 여섯 명의 친구들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