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최대의 실책
[지난 줄거리]
윌리엄은 지금껏 헤이온이라 믿어왔던 여인이 백설 공주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설은 울며 호소하는 윌리엄에게 헤이온은 왕자를 연모하고, 윌리엄은 백설 공주와 파혼해야만 하는 모순된 진실을 이야기한다.
시리우스는 감옥에서 윌리엄과 마주하고 시리고 답답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필립을 찾아간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가 슬퍼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필립은 저도 모르게 그를 품에 안는다.
미뉴에트는 백설 공주로 변장하려 아르델 왕국에 도착했다. 아르델 국왕은 백설이라 말하는 두 여인을 두고 투표에 붙여 진짜 공주를 정하고 가짜 백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한다.
23화 : 최대의 실책
하나. 필립 왕자와 피오나 공주의 결혼식은 윌리엄 왕자와 백설 공주의 결혼식과 같은 날에 거행한다.
둘. 피오나 공주가 아르델 왕국에 머물 수 있는 새로운 성과 영지 건축에 필요한 비용을 준비한다.
셋. 아르델 왕국이 피오나 왕국과 국경을 이어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자작나무 숲 전역에 아르델 왕국의 병사를 배치한다.
“두 사람의 정략결혼의 골자는 이렇소만, 천천히 살펴보시오. 공주.”
시리우스는 치욕적인 정략결혼 조항에 치를 떨었다. 손톱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숨을 고르고 말문을 열었다.
“국정에 밝지 못한 제가 봐서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다만, 굳이 서두르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하하, 좋은 일은 겹쳐야 더 흥이 나지 않겠소? 아,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으니 공주도 내일 접견실에서 만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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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견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곳엔 초라하고 볼품없는 백설 공주와 백설 공주를 완벽하게 재현한 미뉴에트가 나란히 서 있었다.
“지금부터 누가 진짜 백설인지 투표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어제 말했듯이 백설이 아닌 자는 아르델 국법에 따라 처형할 것이오. 투표할 사람은 이븐 왕국의 열두 명의 신하만으로 하고자 했는데 수가 반씩 나오면 곤란할 수 있으니 내가 한 표를 더하겠소.
단 한 표라도 더 받은 자가 백설 공주라고 생각하겠소. 그리고 그 이후에 두 번 다시 이 일을 언급하지 않겠소이다.”
타이르는 듯한 한편으론 협박하는 듯한 국왕의 말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밤 라오스는 이븐 왕국의 재상과 마주 앉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르델 국왕이 정말 투표로 백설 공주를 결정하고 사람을 죽이는 ..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까요?”
“백설 공주가 윌리엄 왕자와 정략결혼을 맺기 전부터 이븐 왕국은 아르델 왕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었소. 언제 먹히느냐가 시간문제였지요. 오히려 정략결혼이 그 시기를 훨씬 뒤로 늦춘 꼴이 되었지만..”
“그렇다면 대체 왜 정략결혼을...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백설과 윌리엄의 정략결혼은 아르델 국왕이 저지른 최대의 실책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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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표결에 부치기 전에 어느 누가 운명을 달리할지 모르니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들어봐야 도리겠지? 자, 감옥에서 부활한 너부터 말해보거라. 아니면 고상하신 공주님부터 말해보겠소?”
능글맞게 웃으며 국왕은 백설과 미뉴에트를 번갈아 쳐다보고 주변을 살폈다. 왕 말고는 그 누구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자는 없었다.
그때 백설이 고개를 들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지금껏 백설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부끄럼 게 생각했습니다. 이름에 나를 가두고 숨어왔던 나를 그만 용서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븐 왕국의 백설 공주입니다.”
아르델 국왕은 숙연해진 접견실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깨뜨리며 박장대소했다.
“마지막 유언 치고 꽤 멋진 말을 지껄이는구나. 잘 들었다. 어찌 공주께서도 하실 말이 있으시오? 표정으로는 이미 저 계집에게 제대로 한 방 먹어서 할 말을 잃은 듯하오이다. 그럼 길게 끌 거 없이 바로 표결에 부치도록 하지요. 표결은.. “
뜻밖의 말에 라오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르델 국왕은 정략결혼을 무르고 다른 방법을 선택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소. 하지만 매번 의도적으로 그 선택을 피해왔소.”
“어떻게든 만회해서 더 큰 것을 노려보려 한 게 아닐까요?”
“정치를 모르지 않는 위인이 유독 이 문제만큼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밀어붙인다는 느낌이랄까... 필요 이상으로 힘을 쏟아붓고.. 심지어 이븐 왕국 왕비까지 손을 대지 않았나..”
“그건 이븐 왕국에 있던 신하들이 저지른 게 아닙니까?”
“백설 공주가 도착하지도 않은 애매한 시점에서 왕비를 섣불리 죽일 리가... 필시 아르델 국왕이 개인적으로 사람을 시켜 저지른 일이라네.”
“일개 나라의 왕비를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댈 수 있는 자가 백설 공주를 두고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리려 하는 게 더 납득이 안 가는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백설 공주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지만…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네… 이리 무모한 일을 벌인다는 건 이제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판단이 섰다는 말이고.. 그 책임을 떠넘길 구실을 찾겠다는 거지. 표결은 분명 공개적으로 손을 들어 하고자 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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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 공주 표결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의사를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으로 하겠소. 그럼 시작합시다. 저기 곱게 차려입은 분이 이븐 왕국의 백설 공주라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들어 보시오. 어서..! “
왕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대신들은 여기저기서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이븐 왕국의 신하 열둘이 모두 손을 들었다. 국왕은 손을 들지 않았다.
“아니… 불쌍해서 이걸 어쩌나? 그렇다면 나는 여기 엎어져있는 가엾은 계집에게 한 표를 던지겠네. 이거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렸군.
이 계집은 내일 날이 밝은 대로 처형토록 하겠소. 네게 짐이 큰 은혜를 베풀도록 하지. 여봐라, 저 계집을 씻겨주고 예쁘게 치장해주어라. 네 원대로 백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죽음을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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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는 공개 투표 방식이 될 경우 수를 써 보지도 못하는 게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다.
“우선 아르델 왕에게는 자신의 생각대로 신하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인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네. 그래야 방심을 할 수 있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븐 왕국의 사절단으로 온 대신들의 대부분은 아르델 왕국의 첩자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네. 하지만 내일은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아르델 국왕에게 충성한 듯 행세를 할 것이라네.”
“모두가 누구를.. 지목한다는 말인가요?”
“당연 우리가 데려 온 백설이지.”
“그러면 감옥에 갇힌 진짜 백설은..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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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르와 도나우는 아까 전부터 시리우스를 찾고 있었다. 방금 전 일로 이성을 잃은 시리우스가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도나우! 저쪽 정원 뒤에는 가 봤어?”
“거기 없어. 지하감옥은?”
도나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흩어진 둘은 성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마다 붙잡고 피오나 공주의 행방을 묻고 돌아다녔다.
그때 숨을 헐떡이며 필립의 침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시리우스였다.
“공주가 이리도 분주한 발걸음으로 나를 찾아오다니 어찌 조금은 감격스럽소.”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리우스는 필립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필립은 그를 일으켜 세워 침대 위에 앉혔다.
“공주,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해 보시오.”
“백설…을 .. 백설을 살려주시옵소서.. 감옥에 갇혀 있던 그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필립은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끝까지 부인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공주에게 그 계집은 무엇이오?”
예상치 못한 필립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자칫 잘못 말했다간 정체가 들통나서 일을 그르칠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여인을 구하기 위함이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에 필립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략결혼을 이용해서.. 나를 이용해서.. 구하고자 하는 여인이 그 계집이냔 말이오..?”
시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필립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쏟고 있는 시리우스의 얼굴에 손을 뻗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볼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필립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나를 쓰시겠소? 그 대가로 공주와 보내는 하룻밤을 받겠소.”
필립은 시리우스의 입술을 어루만지더니 그대로 천천히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시리우스는 두 손으로 힘껏 필립을 밀어냈다. 필립은 그의 팔을 세게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손을 붙들린 채 필립의 눈을 바라보는 시리우스는 턱끝까지 차올랐던 진실을 고백했다.
“왕자님… 전.. 남자입니다..”
필립은 한쪽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