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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S 오픈 플레이스 Oct 24. 2021

프롤로그: 불편하게 잘 사는 법

 런던, 워릭, 옥스포드. 

그러고보니...우리는 거의 2년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 

스코틀랜드에 바닷가 마을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중세 도시 요크로, 그리고는 런던에서 워릭으로.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은 제일 먼저 집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리를 익히기도 전에 물어 물어 부동산을 다니고, 도시마다 예산도, 사는 방식도 그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처음에 구한 집은 도대체 어디에서 바람이 드는지, 또 왜 수도는 찬 꼭지와 뜨거운 꼭지가 따로 두었는지, 

'합리적인 불평'을 하다못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집에서 사는가' 궁금했고, 십 년간 일곱 채의 집을 빌려 살고 나니, '과연 집이란 무엇인가', 커다란 물음표가 마음 속에 생겨 있었다.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한 살짜리 아기를 데리고, 겁도 없이 런던 시내의 대학가라 할 블룸스버리Bloomsbury 의 방 하나 달린 플랏을 구경다녔다. 그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건 정말 말도안돼"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방 세개짜리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는 집세에,  심지어 집집마다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씩 있었다. 어떤 집은 방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다른 집은 세탁기가 없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매일 세탁기를 돌려서 뺀거래요. 알다시피,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건 좀 그렇잖아요?" 뭐가 그런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 몇년간, 맛집으로 손님들이 줄을 서는 피자집 위에 작은 집에 살기도 하고하고, 백년은 족히 된 건물의 아파트를 보러다니기며 "박물관같아." 소근거리기도 했다.


수많은 런던식 플랏의 가장 큰 특징은, 내부는 작은데 컴팩트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하면 공간을 알뜰하게 쓰고, 동선을 줄일까를 전혀 고민하지 않은 쿨한 공간. 주생활 문화에 대한 편리성을 뛰어넘은 파격적인 공간이다. 좁은 키친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다거나,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따로 나와서 추우나 더우나 호호 불며 손을 씻어야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고보면, 런던 시내의 작은 커피숍에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도 평온한 얼굴로 책을 보는 런더너들은, 이미 작고 불편한 공간에 훈련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불편한 집에서 잘 사는 비법이 있다면, 많은 일들을 밖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집에 서재는 커녕 소파를 놓을 공간이 없으면, 비가 와도 슬슬 걸어나가 시내의 서점에서 낯선 사람 사이에 서서 책을 보고, 근처 커피바에 서서 커피 한잔 마시고, 카페의 조그만 테이블에도 "같이 앉아도되요?" 하고 끼어 앉으면 된다. 런던 시내의 렌트 가격을 생각하면, 방문도 달리지 않은 아파트에 사는 것은 말도 안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족한 집의 기능을 바깥에서 찾아서 쓰며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공원이나 놀이터의 운영 시간은 '어두워질때까지'인데, 겨울무렵  세시반에는 깜깜해졌다. 한참 놀고싶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 가지?’ 고군분투하다가, 우리는 생활비를 쪼개서 일주일에 며칠, 유치원을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 몬테소리 유치원에 자리가 있다고 했다. 

“저희 집이 좁은데, 아이가 한참 뛸 나이라서요.” 

유치원 원장님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희 유치원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놀 공간때문이에요. 저희는 멋진 빌딩에 넓은 공간을 자랑하지요.” 분명 유치원은 멋진 스패니쉬 성당에 자리하긴 했지만, 지하에 있어서 낮에도 컴컴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런던인데. 단점이 없을수가 없지뭐." 


유치원 커리큘럼에는 수요일마다 ‘스타벅스 투어’가 있었다. 

“스타벅스 투어가 뭐죠?” 

“근처의 스타벅스에 선생님들과 가서 베이비치노 한잔을 즐기는 프로그램입니다. 아이들이 카페에 가서 잘 행동하도록 하고, 또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거죠.” 

이 독특한 유치원 프로그램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은 의심쩍어하며 "선생님들이 가고 싶어서 넣은건 아니야?" "스타벅스에서 싫어하지않을까? 애들이 자리 다 차지하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면, 분명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커피숍 예절은 정말 중요한 삶의 기술이라고, 레드썬을 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의 이웃에 살고 있던 뮌헨에서 온 니콜라 가족은, 층간소음으로 아랫집과 갈등을 겪으며, 굴뚝에서 벽난로로 그을음이 내려앉아서 온 거실이 석탄투성이가 되며, 런던을 혹독하게 겪고 있었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대학원생이었던 그녀는 자주 나를 초대해서 '집에서 만들던 요거트 레몬 케이크'를 구워주곤 했다.그러면서, 뮌헨의 '집'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 했다.


"너희 집'은 어땠는데?" 

그녀의 성이 상류층이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기에,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 문득 호기심이 일었기에 물었다.  

"나는 집에서 아픈 적이 없었어. 우리는 '자동차 반대파'라서, 대부분 걸어서 다니고. 식사로는 근처 시장에서 유기농 생선을 사와서 버터를 곁들여 구워서 먹곤했어. 이상하게 집에서는, 밖이 아무리 추워도 감기걸린적이 없었어." 그녀는 빨갛게 된 코로 레몬을 잔뜩 즙을 내며 말했다. 그렇게 '집'에 살면서도 집의 평범하고 단순함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작은 집, 좁은 거리, 반지하 유치원과 좁은 커피숍에 익숙해져갔다.


그렇게 몇 년, 공간은 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아이들 생일 파티를 집안에서 하기 어려우니 동네 공원에서 피크닉으로 하고, 좁은 길에서는 서로 조금 조심해서 걷는 연습을 하게되는 것처럼. 나름의 문화와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공부방은 점차 도서관이나  커피숍이 되었고, 요리란 간단한 토스트, 덮밥 정도를 해 먹는 작은 공간일 뿐이었다. 파티 메뉴도 한가지, 어쩌다가 계란초밥을 만들면 친구들은 "무슨 날이냐?"며 흥분하기도 했다. 


"나 출근하래." 직장을 찾던 남편이 어느날 상기된 모습으로 소식을 전해준 지 얼마 되지않아, 우리는 익숙해진 삶의 모습을 뒤로하고 런던을 떠나 워릭warwick이라는 작은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런던의 친구들은 "조금 숨쉴 곳이 있는 곳으로 가네. 아이 기르기 좋을것같아." 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어떻게 런던 시내를 벗어나서 살아?" 


우리는 기차로 한시간 반 벗어난 워릭이라는 지방의 케닐워스라는 마을로 갔다.  우리가 새로 구한 집은 우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인 1900년대에 지어진, 수십채의 집들이 연결되어있는 테라스하우스였다.  “빅토리안 하우스라고 하지만, 이런 테라스하우스는 왕족과는 관련없이 가난한 편인 서민들의 집이었던 것 같아. 전쟁 때 성벽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네.” 남편이 말했다. 

그 집의 특징은 길쭉하면서도 기이한 구조다. 먼저 작은 현관으로 들어거서면 길쭉한 거실이 나오고, 그 뒤로 역시나 긴 키친이 붙어있다. 그 키친의 끝에는 화장실이 붙어있어 마치 기차칸같은 구조를 자랑했다. "원래는 없던 화장실을 증축해서 붙인 것이거든요". 집주인이 설명해 주었다. "그럼 옛날에는 화장실이 없었나?” 뒤늦게 궁금해졌다. 


그러나 모양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겨울이 오자, 단열재가 전혀 없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 안은 때로 바깥보다 추웠다. 나무로 된 일중 창에는 아침마다 비온 것처럼 물이 맺혔다. 증축된 키친과 화장실의 타일 바닥이 얼음과도 같아, 겨울에는 키친에 들어가기 전에 큰 호흡을 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슬리퍼에 숄을 두르고, 총총거리며 키친에 들어서면 그 얼음같은 타일의 느낌에 창문을 닦았다. “잘때도 이불을 그냥 덮지 말고, 얼굴만 내고 꼭 싸서 덮어.” 남편은 엄중하게 우리  모두에게 말하기도 했다. "추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불편함을 이기는 것은 애착이었다. 그 빅토리아 하우스의 집주인이던 이안은 멋진 눈웃음에 수염을  기른 60대로 바이크를 타고 우리 집을 돌보러오곤 했다. "언제부터 바이크를 탔나요?" 묻자 그는 "혹시 중년의 위기라는  말  들어봤나요?" 하고 대답했다. 앤틱가구를 하던 그는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이 집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운치있고 아담한 집이었지만, 가끔 그 화장실에 단열재좀 넣고, 창문은 다 뜯어냈으면 싶었지만, 아침마다 이슬이 맺히고 물이 안빠지는 집이었지만, 이안은 그걸 알면서도 문고리나 수전을 가르키며 집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런 테라스하우스는 이 집은 내 어머니가 살던 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내가 더 나이를 먹으면 이 집으로 들어오려고 해요."  더 나이가 드시고 가파른 빅토리안 계단이나 전혀 인설레이션이 안된 추운 집은 어떻게 살까, "좀 불편하지만 100년된 집에 살려면 감안해야죠. 그때마다 고쳐서 살면되요. 이런 집은 그만한 가치가 있죠". 그는 오래된 집을 고치는 자체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집을 오래된 전자제품같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돌봐주고 보존할 문화처럼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런던의 작은 아파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백 년 된 빅토리안 하우스에서도, 투덜거림은 점차 잦아들고나서, 애착을 배워갈 수 있었다. 내 삶도 집과 놀랄만큼 닮아갔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식당에는 나즈막하고 작은 사이즈의 하얀색 아이키아 소파를 들여놓았고, 아침이면 숄을 두르고 동동거리며 영국의 긴 겨울을 느꼈다. 둘째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촛불을 켰던 것, 한 낮에도 벽난로 옆에서 목욕을 시키던 기억, 처음에는 분명 "도대체 다들 왜 불평도없이 이렇게 사는거야?"하던 합리적이고도 정당한 불평은 점차 변해갔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거나, '집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의연하게 추억을 만들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활과 생각을 결정짓는 집, 조금 더 편하고 마음에 드는 집에 산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영국 집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워릭에서 일한지 5년 정도 지나, 우리에게 두 아이가 함께하고 있었고, 함께 지낼만한 공간을 빌리는 비용이 점점 비싸진다고 느낄 때쯤, 우리에게 첫 집을 구할 기회가 찾아왔다. 때는 마침 남편의 일로 우리가 옥스퍼드로 떠나야 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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