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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Nov 04. 2023

7화  남파랑길 위에서 만나는 시간

바다는 점잖고


바다는, 남녘의 바다는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얌전을 빼고 앉아있다. 파도가 밀려왔지만 철썩이지 않았고, 바람은 해풍이라고 하기에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상주 은모래 해변의 한구석에서 그렇게 남해를 만났다.

 

가로등이 흘려놓은 불빛은 희미하고 가느다랗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해변은 조용했고, 시간은 무슨 일인지 느린 걸음을 걷고 있다. 반대편 캠핑장에 자리 잡은 몇몇의 캠핑족들도 등불 몇 개를 내걸어놓고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아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남해의 밤은 잔잔하고 덩달아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랜턴을 밝히려다가 달빛이 좋아 뒷문을 열고 앉았다. 바다 내음이 한 움큼 밀려들었다. 그 뒤를 따라 차가운 밤기운이 슬며시 들어왔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조용히 내려왔다. 달빛을 머금은 모래사장이 아름다웠다. 마음이 들끓었다. 침낭을 걷어차고 맨발로 해변의 모래밭을 걸었다. 부드러웠다.


남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걷기 여행길로, 1,470km 총 90개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구간을 걸어 아름답지 않을까만,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싶었다. 미조포구를 생각했지만, 차박 장소로는 아늑하지 못하여  차를 세운 곳이 상주 은모래 해변이었다. 차박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를 세우는 장소이다. 마음이 평안하고 아늑한 곳이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전이 담보된 곳이 우선이다.


그래서 내가 즐겨 찾는 곳은 학교, 파출소, 교회, 마을회관이다. 관계자분들께 사정을 말했을 때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은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사찰의 주차장도 좋다. 이것은 불을 피우지 않는,  그야말로 주차하고 차 안에서 잠을 자는 것만 하는 스텔스 차박이기에 가능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차박의 장소는 많다.


오늘 걸은 길



아침이 밝았다. 과일과 우유 한 컵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41구간 출발지점인 천하몽돌 해변으로 갔다.




속을 다 드러낸 거목이 자리한 몽돌해변은 몽돌해변이라기보다는 거친 돌 해변이었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지 않았다. 하루 종일 파도가 몰아치는 동해와 달리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쪽빛 수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 남해이고, 그런 남해를 보듬고 남파랑길은 구불구불 이어진다.





마을은 늘 아늑한 포구에 안겨 있다. 거센 파도가  몰아쳐 올 틈이 없는 고요하면서도 잔잔한 바다가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길은  마을과 마을 잇다가도 어느 순간 산으로 쑤욱 들어가 버린다. 숲에 몸을 숨기는가 하지만 이내 바닷가로 내려간다.


바다를 붙들고. 바위가 되어 다시 하나 기다림을 안고 수면을 구르는 윤슬을 만난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덩달아 바다를 바라다본다.

바다는 출발점일까, 도착점일까.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무엇을 그릴까. 나는 오늘 바닷길을 걸어 무엇을 만나고 어떤 마음을 다독여야 할까.


전망데크에 앉았다. 바다는 말이 없고 그나마 같이 걷던 사람들 몇 분 들도 저만큼 앞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버렸다. 가을은 통랑한 햇살로 쏟아지는데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남파랑길 걷는 걸음을 그만두고 데크에 기대어 앉아 시집이나 한 권 읽고 싶어졌다. 정호승 시인이나, 나태주 시인의 시 같은.






상주은모래 해변은 참 고즈넉하다. 예전에는 상주해수욕장이라고 불렀었는데 지금은 상주 은모래 해변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사실 해변은 겨울이 좋다. 찬 바람은 불어오고 날은 차가울 때, 코트깃을 세우고 느릿하게 걸어보라. 시간이 멎은 듯할 때, 겨울의 바다는 팔팔하게 살아난다. 가슴에 묻어 둔 그리움이라도 하나 솟아날라치면 가슴은 두근거리고 마음 속에 드러나는 얼굴이 있다. 사랑이고, 행복이다. 



지금은 가을의 한 낮. 

바다는 조용하고 가을 햇살만 바다에 내려 앉는다. 그냥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는 시선은 무채색의 시간들을 늘어 놓고, 지난 여름이 남겨둔 추억이나 하나 건져 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모마을에서 걸음을 멈춘다. 

적막하다 못해 쓿쓸한 바닷가에서 당산나무 아래에 앉아 마을의 이야기들을 걷어 올린다. 지난 여름의 풋풋한 시간들을 다 내려놓고 낙엽을 떨구고, 제 살을 깎아 겨울을 맞으려는 나무는 붉은 잎 하나씩 떨구고 속으로 웅크려 새싹을 장만하리라. 

하늘은 푸르고 오후의 시간은 아직 꼬리를 드리우고 있으나 , 오늘의 걸음을 접기로 한다. 고개들어 하늘을 보니 금산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산길을 열어 놓고 있다. 마을에 심어 놓은 조 이삭을 만져보다가 아주 오래오래 삭아버린 어린 시적의 추억을 반추해 본다. 

조 이삭으로 밥을 지어 먹고, 술을 담가먹던 가난했던 시절의 랩소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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