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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만성온달이 Mar 20. 2024

혜화동 1

추억의 길

종로 5가에 위치한 사무실에 갈 때는 혜화동을 거치게 된다. 차를 가지고 나오는 날에는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서울대병원 옆 길을 이용하고 지하철을 탈 때면 마로니에 공원 길을 따라서 걷는다. 

수유동에 살았을 때는 고등학생이 되어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버스와 지하철로 등교하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벽이 학교의 외벽인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종로구 혜화동과 성북구 성북동에 발을 디뎠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혜화동에는 내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다. 

여전히 장면총리 가옥의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혜화역에서 내려 학교로 향하던 길목에 자리한 그곳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었다.   


지금은 로터리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가 철거됐지만 그때는 위아래로 지나는 도로와 그 둘레를 수놓은 분수대가 있었다. 길가와 주택과 상가들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도 여전한 것이 있다. 동양서림은 혜화동의 역사와 문화를 지탱이라도 해주듯 곳곳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에는 주변에 있는 학생들의 참고서 판매로 쏠쏠했던 곳인데 이제는 인문교양서적을 주로 갖춰놓고 너른 테이블에서 책도 읽을 수 있게 만든 격조 높은 쉼터로 탈바꿈했다. 혜화동 로터리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총탄에 의해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코너를 돌아 종로 쪽으로 진입하기 위해 잠시 정차한 차에서 그가 쓰러졌던 자리와 동양서림을 바라다본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들어서면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의 귀에 못이 박히듯 강조하셨던 선생님의 종래가 되살아난다. 오전 수업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라는 신신당부의 말씀이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일요일까지 대학로 일대는 차량 출입이 통제되어 길과 도로는 순식간에 가히 해방구에 가까운 자유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차가 다니던 도로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온갖 퍼포먼스를 즐기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억압을 폭발해 내는 흥이 넘치는 문화 공간으로 바뀌었다. 놀고 즐길 줄 아는 친구들은 특별히 주말용 의복을 가져와서 멋지게 갈아입고 타 고교 학생들과 미팅도 하면서 약간의 일탈을 맛보기도 했다. 나 역시 토요일 오후의 자유를 갈망하며 마로니에 공원 일대를 배회했던 기억이 있다. 풍물패와 무명 가수들의 공연으로 들썩이며 막걸리 질펀한 흥이 가득했던 그 공간은 자유로움을 갈망했던 그 시대의 몸부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로는 예술가들의 창작과 교류의 장이 되면서 1985년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됐다그리고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 오후엔 차가 다닐 수 없게 했다시민들은 도로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공연을 감상하고 행사에도 직접 참가하면서 신명 나게 놀았다삼삼오오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대학로 차 없는 거리는 1985년 5월부터 4년간 지속되었다. -경향신문-

     

대학에 들어와 고교동문회로 모였을 때도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끝끝내는 혜화동을 찾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술에 취해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고등학교의 교가를 불러야만 그 모임을 끝낼 수가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서서 교가를 부르는 것은 마치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주의 첫 빛이 동방에 비취시사 사면 뻗쳐서 뻗어가니......”

미션스쿨 특유의 찬송곡인 교가를 남성 4 중창으로 나눠 부르면서도 그 장중한 장엄미에 정신이 번쩍 깨었다. 고교중창단 출신이 끼어 있어서인지 중저음과 테너의 화음은 웅장하고도 진중했다. 


그날은 모임은 늘어지게 길어지는 바람에 명륜동에 사는 선배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양반댁 전통가옥이라 기와에 마당이 있는 너른 집이었다. 예스러움이 묻어나면서 부유한 기풍이 깃든 한옥이었다.

선배는 자기 방에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펼쳤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혜화동의 근사한 경양식당에서 점심을 사줬다. 레스토랑 앞길에 열차의 침목을 깔아놓은 인상적인 곳이었다. 

동문회에서 처음 본 선배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날 따스한 수프를 시작으로 분위기 있게 식사한 그 카페의 온화함이 내 몸에 아로새겨져 있다. 


냉면사발에 소주를 들이붓고 마시게 했던 호된 신고식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그 후로는 동문회 모임의 참여가 뜸했다. 그 후론 그 선배도 만날 수가 없었다.  군대에 오고 가는 시기가 달라서 마주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지금처럼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 아니니 말이다. 

연지동에서 혜화동을 향해 걸으니 30여 년 전의 과거와 오늘의 현재가 중첩되면서 기억과 추억이 되살아 난다. 거리는 여전한데 세월은 지나고 기억은 새록새록하다.


그 선배의 친절이 떠올라 흐뭇하고 다른 추억들로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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