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이 바로 우리의 현장이요 현실이다
일제강점기를 견디며 해방 후 미군정을 겪고 2020년 철도 노동자로 업을 이은 3~4대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증언이라 생생하면서 아리다.
일제는 한반도를 자기 손아귀에 집어넣으며 중국대륙에까지 도달하려는 야욕으로 철길을 만들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철길에 의해 민중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고, 소유권을 박탈했으며 터무니없는 보상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아 사람들을 유랑 빈민으로 전락시켰다.
고향을 잃어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 철도 공사를 맡는 노역자가 되었고, 강제 동원되다시피 한 사람들은 혹사당하면서도 잘 먹지 못했으며 위험한 작업에 안전 장비 없이 내몰려 죽음을 당하곤 했다. 길을 내느라 돌에 깔리고 폭약에 굴이 무너지고 무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그런 착취와 수탈로 연결된 철로를 통해 일제는 한반도의 식량과 자원은 물론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아 사람과 물자를 뽑아 갔다.
영등포는 남쪽으론 부산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평양을 지나 만주 벌판까지 이어졌다. 철도 운행의 핵심 역할은 일본인이 떠맡았고 조선인은 그들의 조수나 한정적인 역할만을 수행케 했다. 식민체제와 자본주의의 착취 속에서도 철도와 공장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에 눈을 뜨며 저항을 통한 연대를 배워 나간다. 식민지 시대의 압제와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짓누르는 자본주의 폭주를 멈추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장하며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사상과 조직을 결성한다. 뜻있는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서, 열악한 노동환경의 타계를 목적으로 조직을 중심으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이들은 눈엣 가시인 적으로 체포와 구금 및 사살의 대상으로 불령선인과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직업이 변변치 않았던 어떤 이들과 출세에 혈안인 이들은 기꺼이 일제의 끄나풀이 되기를 바랐고 협력했으며 독립운동가와 노동계급 활동가들을 밀고하고 잡는데 일조했다. 붙들려간 혁명가들은 모진 고문, 열악한 감옥 환경, 굶주림 추위에 떠느라 불과 몇 개월만의 옥살이에도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 와중에도 공산주의와 종교에 입각한 양식 있는 일본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도우며 인류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경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사상적으로 격려하며 발각되어 자신이 총살당하면서까지 조선인을 도왔다. 동포를 팔아 유익을 취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멈추고 인류애를 실현하려고 조선인을 돕다 죽임 당한 양심적인 일본인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느닷없이 종전을 선언했다. 일제에 협력해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를 탄압하고 고문해서 죽였던 조선인 부역자 경찰과 군인들은 잠시 주춤하며 숨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새롭게 남쪽의 주둔군이 된 미국에 의해 유유히 부활한다.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은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물론 검사나 판사의 과거 이력을 조사하고 조선인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라 재판정에 세워 사법적 처벌을 했다. 따라서 수많은 조선인 출신 경찰과 관리가 이남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9월 초까지 서울은 일본군이 지키기 시작했고 일제 경찰 간부들은 조선인 경찰 간부들에게 직임을 승계해 주었다. “ 533페이지
“미군 제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상륙하며 남한의 군정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미군은 이후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남한 지역의 행정을 직접 관할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은 남한 내에서 민중의 지지와 신뢰를 받으며 조직되고 있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한 민중과 노동자 농민이 바라는 정책은 미군정의 친자본주의적 정책과 충돌했다.
친일파와 이에 동조한 세력의 축출을 통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 일제강점기의 지배 질서를 그대로 이어서 안정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다고 판단했다. 기존 체제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라면 악질 경찰이나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 압잡이 군인 법조인 교육자 등이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해방되던 그해 겨울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미군정이 통치비용의 조달을 목적으로 화폐를 무책임하게 마구 찍어냈던 것이다. 그해 십이월에는 이전의 팔월에 비하여 물가가 무려 칠십 배 수준에 올라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쌀 두세 말 갑의 임금을 받으려면 일주일에 백여 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540페이지
일제에 협력하며 고등계 형사의 끄나풀에서 독립운동가와 의식적 노동운동가들 잡아들이며 승승장구했던 최달영은 해방 공간에서 그에게 고문당하고 죽은 동포의 분노의 칼을 맞고 숨을 거둔다. 미군정에서 경찰서장으로 부활해서 승승장구하려던 순간 정의의 심판을 받은 셈이다. 소설 말미에서 잠시나마 후련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단죄받지 않은 각 분야 대다수의 친일 협력자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수립 이후 돛 단 순풍에 날개를 얻는다.
해방 직후 민족적 자주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던 민중의 요구는 친자본주의적 미군정의 정책과 처음부터 충돌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강화하고 토지개혁을 요구한 민중들의 요구는 미국의 반공주의적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공산주의를 적으로 만들어 대응하려면 남한 내의 질서를 빠르게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군정은 일본군과 친일파의 행정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활용했으며 이 지점이 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었다.
해방 후에도 독립과 노동운동으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일부의 활동가들은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피신했다. 작가 황석영은 방북 당시 북에서 만났던 영등포 출신의 철도 기관사의 서울 말투에 영감을 받아 대서사를 완성해 낸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역사를 읽었지만, 소설은 그 사실에 뼈와 살을 입혀 생동감 넘치는 현실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이백만과 이일철이 감내해야만 했던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이일철이 해방공간에서 겪는 좌절, 고공농성을 벌여야 하는 현재의 이진오에 이르기까지 굴곡의 근현대사를 재현했다.
작가는 그의 말처럼 이들의 삶을 소설로 승화해 한국문학의 비워진 부분에 채워 넣으면서 한국 노동자들에게 헌정하려 한 것 같다.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손으로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현실에 대한 자각과 지혜로운 힘이 필요하다. 염상섭의 ‘삼대’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역사와 서사를 엮어 각성을 선사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