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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산하의 강연과 시낭송회를 다녀와서

한라산, 악의 평범성

by 준구

이제는 폐역으로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능내역 건너의 조그만 “능내책방”에서 시낭송회가 열렸다. 시인과의 대담과 시 낭송은 그와 잘 알고 지내는 월간지 대표의 사회로 진행됐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한강변의 한적한 곳으로 차량과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웬만한 관심과 애정이 아니면 시간 내어 걸음 하기 어려운 토요일 오후에 사람들이 서점을 가득 메웠다.

시인을 애정하는 팬의 한 사람은 몇 년 전 시인이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쾌차를 기원하며 미리 부의금을 걷어 보내자는 운동에 참여했던 독자였다. 그의 손에는 시인이 출간했던 모든 책들이 들려 있었고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도 목소리가 떨렸다. 80년 중반의 학번이라고 밝히는데, BTS앞에서 사인을 받는 소녀처럼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한 시간 반 가량 이어진 대담과 낭독 독자와의 대화 속에서 몇 가지 단어가 순간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한라산”에서 다루었던 제주 4.3을 이야기하다가 나온 대살이라는 용어다.


“제주 4.3 사건에서 '대살'代殺은 진압 군경이 무장대 연루 혐의로 가족
구성원 중 한 명만 없어도 도피자 가족으로 간주하여 부모나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제주도민은 해방된 공간에서 하나의 나라를 갖길 소망했고 일본이나 미국의 어떠한 힘도 빌리지 않는 한민족 스스로의 자주적인 국가를 갖고 싶었을 뿐인데, 이념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남한 만이라도 정부를 빨리 세우길 원하는 세력과 군인 경찰 및 “서북청년단”에 의해 반국가세력과 폭도로 몰려 초토화작전에 희생된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한 사람이라도 부재했을 경우 도피자로 몰리고, 폭도를 도운 사람으로 간주 돼, 자녀 대신 부모가, 아버지 대신 아내가 학살당했다. 아무런 재판 과정도 없었다.


1987년 사회과학전문지 ‘녹두서평’ 창간호(3월)에 실린 이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한국사회에 당시까지 금기시되던 제주 4·3 학살의 실상을 폭로하며 충격을 준 작품이다.

토벌대는 그 마을의 가족 수와 상황을 잘 아는 자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을 색출해 냈을 터이니 마지못해 협력한 사람은 사망자 가족과도 안목이 있고 친근한 마을 사람이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제주 4.3에 관한 진상 조사가 이뤄지고 배상이 진행 중이라지만 여전히 속앓이 하며 묻어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교묘한 행동대장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누군가를 앞세웠고 이들은 차마 서로 발설할 수 없는 원한관계에 놓였다. 시간이 흘러서 마을의 자녀들은 장성해서 과거를 모른 채 사랑해서 가정을 꾸렸는데, 어쩌면 조실부모한 나의 아버지를 죽게한 가해자가 아내의 부모일 수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었다.


우리 현대사엔 명백한 피해자들은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늘 모호하다. 제대로 된 사과로 무릎 꿇는 이가 없다.

가해 세력은 교묘하게 숨고 본질을 흐려서 들러리들만 욕보게 만든다. 남한의 단독정부가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미군정 또한 4.3의 희생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독일의 빌리브란트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을 느끼며 무릎 꿇었던 것처럼 가해자의 깊은 사죄가 뒤따르지 않는 한, 4.3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앙금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거란 시인의 말이 가슴을 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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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회자

“악의 평범성”이란 시인의 책에는 2000년에 들어와 백주 대낮에 “00 청년단”에 의해 테러를 당해 다리가 부러진 사고에 관한 글이 있고, 이마에 물방울을 맞던 물고문의 기억을 시로 기술했다. 그 서슬 퍼런 공포가 내 몸으로 전이되는 소름이 몰려온다.

주대경, 황교안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자신을 압박해 오던 공안검사의 서슬 퍼런 위압이 되살아나 신경안정제로 몸을 추스르게 된다고 했다. 제주 4.3을 알리다 고초를 당했으면서도 시인은 이제 남은 여생의 과제로 “인혁당”에 관한 시를 쓰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한결같은 바람을 전한다.

“피었으므로 진다”와 같이 말랑말랑하면서 대중적이고 감미로운 글을 써서 책도 많이 찍고 돈도 벌면 좋은데 왜 알아주지도 않는 고생을 자처하냐고 볼멘 애정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시인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소명 같은 독백을 읊조린다.


시인은 37년 만에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공안기구에 의한 국가불법행위로 인권침해를 받았음을 인정받았다. 가혹행위에 대한 규명과 사과가 진행돼야 하는데, 최근 법정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검찰이나 판사의 눈빛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움이 넘친다며 웃어 넘겼다.

몸에 암이 발병한 지 3년이 지나고 있는데, 암 종양에게는 자신의 몸인 숙주가 죽으면 암도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니 적당히 타협해서 공생하는 쪽으로 가자고 설득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아마 소싯적에 스님이 줘서 먹었던 산삼의 효능으로 건강체질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너스레를 늘어 놓았다. 독자들과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면서 특이한 발상을 피력하는 시인이 천상 문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공식적인 자리를 정리하면서 고깃집에서 모여 뒤풀이를 했다. 소맥을 적당히 말아 건배하면서 시인의 건강과 다음 작을 기원하는 염원을 외쳤다. 시인의 몸과 글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시는 때때는 격정적인 울분으로 가득했다 잔잔한 깨달음의 혜안으로 차분해진다.


부디 건강하시길.

거친 세상에 한 조각 위로의 시어를 흘려 주시길 간절히 빈다.


tempImagebIi0Ol.heic 저자 사인
tempImageDt2uvT.heic 독자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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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wb6SoG788?si=_gmZg5QHAUKXnyvo 차이나는 클라스 : 제주 4.3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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