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 선교사님을 추억하며
실시간 온라인으로 전송되는 영상을 보며 추도식에 참여했다. 내가 있는 곳은 서울이고
예식이 진행된 곳은 르완다 키갈리의 수도에서도 수십 킬로 떨어진 외곽 지역의 카욘자다.
엄숙한 추모 예배는 유치원 아이와 초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로 보이는 어른들과 현지 마을 사람들로 가득한 천막 안에서 이루어졌다.
최영애 선교사.
미국으로 이민 가서 샤론최로 불리던 이름을 르완다 현지인들도 즐겨 불렀다.
샤론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맘으로 60대에 아프리카의 오지로 왔는데 10여 년 이상 그들 곁에서 생활하다 하늘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 70 중반의 연세라 조금 빠르게 본향으로 간 셈이라 아쉬움이 크지만, 10여 년 간의 생애 동안 열정을 다하며 살다 가셨다.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셨다. 그런 교육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있었기에
처음 르완다에 오셨을 때도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았다.
샤론 선교사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10여 년 전이다.
내가 키갈리 월드미션프런티어 고등학교에서 영상제작을 가르치러 방문했던 2주간 그분도 학교 바운더리 안에서 유치원 개원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당시 월드미션프런티어 선교단체와 합류하며 홀홀 단신으로 르완다로 오셨는데 몸은 심하게 마른 상태였다. 암진단을 받으셔서 식이요법을 시행하면서 사는 날까지 자신이 할 일을 잘 감당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계셨다. 재정적 후원은 자신의 형제자매와 장성한 자녀들이 감당해 주었고, 출석하던 미주 한인교회에서 오는 것이었다.
풍족한 미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에 와보니 가난하게 살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 우리나라 상황과 너무도 비슷했다고 하셨다. 아이들을 많이 낳는데 부모는 가르칠 돈이 없고, 아이들을 맡기고 돈을 벌러 나갈 수도 없고,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으니 아이들은 방치되고…….
당장 아이들을 맡아주고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해 주고 교육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인지상정이며 신앙인의 양심 같은 것이었다.
키갈리 중심에서 유치원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이왕이면 더 열악하고 어려운 지역에서 섬겨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지역으로 더 복음이 필요한 지역을 찾아 들어간 곳이 카욘자다.
외국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도시의 변방 지역 농촌은 키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빈곤한 지역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선교사님을 찾아와 허기를 달랬고, 아이들을 모아 돌보기 시작한 것이 보육원이 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바람으로 유치원이란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들이 졸업할 무렵 간곡한 지역민의 염원은 초등학교 건물 건립으로 이어졌다.
재정이 부족해서 한 나라도 못하는 교육 사명을 그가 감당해 낸 것이다.
그의 형제자매와 자녀들,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들에 의해 그럴듯한 학교 시설들이 하나씩 세워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예배당도 세웠다.
그런 공간과 건물을 마련하는 것은 돈이 남아돌고 많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2년 전에 선교사님과 꽤 오랜 시간을 르완다에서 지낼 때 학교 건물에 필요한 물건과 제품 수세식 변기 등을 구입하느라 키갈리 마켓을 자주 드나들었다. 카얀자에서 키갈리 시내로 나오기도 어려워서 한번 오실 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구매해 가셨는데, 그 꼼꼼함과 세심함이 얼마나 심하시던지…
대량으로 실어가는 세면기에 하자나 이상은 없는지 금이 간 것은 없는지 포장을 벗겨서 품목들 하나하나를 확인하셨다. 자신이 어렵게 모았던 돈과 귀하게 후원받은 돈이 한치의 낭비됨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애썼다. 도네이션 받은 재화가 얼마나 어려운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기에 허트게 쓰이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남루하고 허름할지 언정 현지의 아이들과 부모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애썼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암의 전이를 늦추게 하셔서 10여 년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삶을 연장해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이 급속히 쇄약해지신 것은 작년 초반쯤이셨다. 현지에서는 버틸 수 없는 쇠약함이 찾아와서 가족이 있는 한국과 미국에서 요양을 하시다 결국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다시 르완다로 돌아가 아이들과 학교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현지인들 역시 멀리서나마 샤론을 기리는 시간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르완다에서의 추모의식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엄숙히 진행되었다.
그의 헌신과 사랑에 감사했고, 아쉬워했고 애도했으며 하늘에서의 평안을 기원했다.
무엇보다도 배움의 기회를 갖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돈 없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녀들을 통해 내일의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그들의 곁에 머무는 동안 샤론은 그의 사랑과 재정을 가장 효과적인 곳에 심어 놓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육체의 병마와 약함을 벗고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이 마을을 바라도 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진 찍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려하셨는데, 어느 날 하루는 동료 선교사님들과 차를 마시며 쉬는 시간에 나의 제의에 포즈를 취해 주셨다.
다행히 맘에 들어하셨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고 이 애정하는 사진이 그를 추억하는 기록으로 남아서 감사했다.
그동안 애쓰고 수고하셨습니다.
이젠 하늘에서 평안하십시오 샤론 선교사님!
기도하는 손
https://www.youtube.com/live/t0ojq7QWOew 최영애 선교사님 추모식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