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캠의 시야와 현미경적 접근

1. 통찰력으로 바라보기

by 준구


외곽으로 촬영을 나가면 가장 높은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주로 높은 봉우리나 산에 올라야 했죠.

도심이라면 당연히 높은 건물의 옥상이나 빌딩의 고층을 섭외해야 했습니다.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를 담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육중한 방송용 카메라와 트라이포트를 매고 산이나 높은 건물을 오르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땀 흘린 후에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발아래의 세상은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사방이 뻥 뚫려서 시야에 가릴 것 없이 펼쳐진 세상은 온몸에 희열을 일으킵니다.


요즘에는 어떨까요?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넓고 시원한 부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핼리캠이 만들어내는 영상은 그 역동성과 담아내는 영상의 스케일이 다릅니다. 늘 땅에 붙어서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독수리의 자유로운 비행을 통해서 바라보는 지상은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울러 카메라는 현미경과도 같은 밀착된 가까운 거리의 포착도 필요합니다. 피사체나 촬영 대상과의 밀접함과 친밀함이 요구됩니다. 꽃은 가까이에서 보고 살펴야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향기까지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영상은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찍은 그림 모두가 필요합니다.

적당한 거리에서의 포착과 그보다 먼발치에서도 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이즈의 시선들이 모여졌을 때 비로소 좋은 영상으로 편집될 수 있습니다.


영상은 건축물에도 비유됩니다.

시멘트가 있어야 하고 모래도 준비돼야 합니다. 거기에 작은 돌과 큰 돌들을 물과 함께 섞어내야 견고한 벽을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영상은 다양한 사이즈와 카메라 앵글의 변화를 통해서 길이를 채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정보를 얻어 뇌에서 분석하고 가공해냅니다. 영상도 마찬가지로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읽고 해체하는 작업을 합니다. 먼저 세상을 잘 보아야 합니다.


몽골 울란바타르 전망대


한 번은 드넓게 펼쳐진 몽골의 초원을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사방팔방이 확 트였는데, 한도 끝도 없는 평야가 땅과 하늘의 경계도 가물가물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한 곳을 주시하며 끝없는 가시거리에 황홀해하고 있는데, 현지 가이드가 저 멀리서 유목민들이 말을 타고 이리로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와 일행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뭔 좁쌀 같은 크기가 아른거릴 뿐 육안으로는 뭔가를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다며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었는데, 한 십여분쯤 지나니 사람과 말이 다가오는 게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놀라서 가이드를 쳐다보는데, 몽골 사람들은 보통 시력이 2.0에서 3.0인 사람들도 많다며 농인지 진인지 모를 말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잘 캐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잠시 군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때때로 산에서 매복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대번에 누가 도심에서 자랐고 농어촌에서 자랐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심심하고 배가 고파서 쩔쩔매는데 어떤 친구들은 더덕을 캐어 오고 나물도 뽑아오고 식용 버섯도 조달해 옵니다. 거짓말 쫌 보태면 산삼에 뱀까지 잡아 오는 병사도 있습니다.

진심, 제 앞에 산삼밭이 놓였다 해도 저는 눈뜬 봉사나 다름없을 겁니다.

알지 못하니 보이지 않는 겁니다. 정확히 보기는 보아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니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른 병사들의 나눔이 아니면 손가락만 빠는 신세일 것입니다.

지적으로 깨어있어야 잘 볼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영상은 렌즈를 통해서 사물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렌즈에 흑백 필터를 끼운다면 세상의 다양한 색깔이 표현될 리 없습니다. 렌즈에 빨간 필터를 단다거나 렌즈에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다면 담긴 결과는 온통 빨갛게 또는 더럽게 표현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잘 포착해야 하는데 우리는 때로 자신만의 가치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의 세계관과 철학과 가치라는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선택적으로 포착하게 되는데, 냉정하게 통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천리포 수목원의 꽃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장을 담아내는 기자나 피디라고 가정합시다.

서울 시내에 특수학교를 세워달라고 장애아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현장에 와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다 반대하고 나서는 판에 장애아 부모들은 갈 곳을 몰라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편 반대쪽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틀어 설립 결사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애초에 다른 시설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다. 교육 분위기를 해친다. 집값이 떨어진다. 등 등의 이유를 들었습니다.

카메라가 현장을 취재합니다. 장애아 부모들의 아픔에 공감해서 이제는 서울시내 한 곳에서라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갖는다면, 장애아 학부모의 입장에 공감되게 편집해야 합니다.

반대로, 지역주민들의 재산권과 교육권 침해가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주민에게 우호적인 입장에서 영상이 재구성될 것입니다.

그냥 기계적 중립의 입장에서 학부모의 입장은 이렇고 주민의 입장은 저렇다고 전한다면, 똑똑해진 시청자가 우롱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신문이나 방송을 볼 이유가 없겠죠.

이런 류의 취재는 함께 더불어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는 입장을 견지하는 게 보편적일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을 도출하기까지는 지난한 지혜와 상호 이해가 전제되야겠지만요.


다시 과거 시위 현장으로 가봅시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존권 보장을 위해 투쟁하고 국가의 공권력은 이를 막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농민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언론은 과격한 시위대와 지나친 요구사항에 의한 공권력의 정당방위란 입장을 취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국민의 기본권리를 물대포의 직사 발사라는 과잉 폭력으로 봅니다. 카메라가 동일한 현장을 담아내지만 어떠한 견해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낙태에 관한 입장은 어떨까요.

안락사 (존엄사)의 입장은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와 아픔은 또 어떻고요. 피디 개인의 입장과 방송사의 견해가 다른데, 광고주의 눈치도 봐야 하고 정치권력의 비유도 맞춰야 한다면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확고한 원칙들은 존재할 것입니다.

세밀하게 보는 눈과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

세밀하게 보는 눈과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이윱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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