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에서 탈출하기.

지적 불시착이 아닌 연착륙

by 준구


1977년 전국 남녀 웅변대회 대상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수줍고 부끄러움이 많아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아이는 큰누나의 손에 이끌려 웅변학원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소리를 높여 말하며 목청껏 외치는 연습을 했습니다. 대중 앞에 섰을 때의 자세와 제스처를 배우며 많은 사람 앞에서도 쫄지 않는 담대함을 훈련했습니다.

‘무찌르자 000! 때려잡자 000!’으로 시작하는 반공 웅변의 메시지는 지금 생각해도 머리칼이 삐쭉 서는 소스라침입니다. 1977년 초등학교 2학년의 아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적개심을 절절히 피토해내며 수원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웅변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키 보다도 큰 트로피를 부여안고 학교에서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소년에게 주입된 북녘의 사람들은 머리에는 뿔이 두 개쯤은 달려있고 피에 굶주린 짐승쯤으로 인지되어야 했습니다.


중공이라 불렀던 중국과 다시 수교하기 전인 1991년 여름,

대학생이던 청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반도를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때라 공산권을 간다는 것은 더욱 이례적인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학술진흥재단의 이름으로 경비를 후원받았지만, 국가가 대학생들에게 공산권의 실태를 보여서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고취하고자 한 연수를 겸한 여행이었습니다.

북경과 선양 장춘을 거쳐 연변과 백두산으로 가는 내내 일행은 중국 본토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의 가치를 갖고 살아가건 아니 건,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우리와 사는 모습이 너무도 흡사했습니다.


그때 그룹의 안내자로 내내 동행했던 가이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조선족으로 연변에서 자라면서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사람들은 이리나 승냥이처럼 생겼다 했는데, 이제 보니 선생님들 모두가 잘 생겨서 놀랬더란 말입니다. “

청년과 일행은 그 말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뭔가를 들킨 것 같은 감정에서였습니다.

일행에게 각인된 북한과 공산권의 사람 역시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왜곡된 인간의 이미지로 그려졌었기 때문입니다. 중공과 북한 교과서의 영향으로 당시 조선족이 습득한 적대성은, 청년이 한국에서 익혀왔던 이데올로기와 궤를 같이하는 씁쓸한 아픔이었습니다.


북경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태극권 비슷한 무술 동작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중국의 한족이 아닌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설마 한국 사람은 아닐 거로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심경으로 그 사람이 들릴 듯 말 듯 ”옷이 참 예쁘네요 “라고 내뱉는데,

단박에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라는 반가운 화답을 해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떠나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운 희열이 솟구쳤습니다. 우리말을 쓰는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니, 저 여인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북경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헤어졌고, 연변대학에서는 남과 북을 동일하게 사랑하며 조국을 걱정하는 조선족 교수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북한 땅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압록강 접경지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북한의 종업원들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따듯한 정서가 교감되는 순간에는 모두가 울먹하고 숙연해지는 시간을 맞았습니다.

1991년 천안문 광장에서


2003년엔 금강산 관광에 관한 영상 제작을 위해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타고 가서 며칠을 묵었던 배는 한 때 ‘러브 보트’란 제목으로 인기 있었던 미국 드라마 속의 호화? 유람선이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북녘땅을 공식적으로 밟아 본다는 것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이 어떻게 생겼을지 해금강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 일지 궁금했습니다.

금강산을 오르며 일행을 인도해주는 안내원 동무의 설명을 듣고 때론 질문도 던졌습니다. 엄격히 선발된 인원이었는지 미모가 빼어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북의 언어와 남의 언어에서 오는 미묘한 차이가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이것 좀 드셔 보실래요 하고 건넨 먹거리에 “일없습니다”라고 사양하며 괜찮다고 표현하는 모습에서는 그 뉘앙스와 표정에서 웃음이 배어 나왔습니다. 계속되는 권유에 고맙다고 받아 든 안내원의 모습이 정겨웠고 그녀의 한복 치마엔 예스러운 우리 문화가 깃들여있음을 느꼈습니다.

정말 남과 북의 관계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염원을 되뇌며 고된 산행을 감행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중장년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자기의 틀과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물 밖을 나와 시내를 거쳐 강과 바다로 흘러 대양에 이를수록 넓은 세상과 마주하며 넓고 멀리 내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드리워진 채색된 안경을 벗는 것만으로도, 다채롭고 넓은 세상을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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