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피지 - 피지에서 원했던 것은 한가로움

1. 코이카의 ODA지원 현장에서

by 준구

일이 아니었다면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갈 기회가 있었을까?

촬영지가 제주도만 돼도 들뜨고 설레는데 이번 출장지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인접한 신비의 섬이었다. 브룩 실즈가 주연한 블루라군 영화의 배경지로 알려진 환상의 군도를 찾아간다는 흥분에 출발 날짜만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지난 2012년과 13년에 걸쳐, 우리는 코이카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에 지원했던 ODA 현장을 찾았다. 대략 10여 개 국의 20여 사이트를 스틸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몇 년간 개발도상국에 지원했던 우리나라의 자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는 지를 점검하는 영상보고서 성격을 띠었다.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의 목적은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를 하루빨리 개발시켜 더 이상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모든 일정과 동선, 숙박, 스케줄, 하나하나가 코이카에서 준비하고 세팅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너무도 편한 마음으로 제작에 임했다. 제작진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촬영하고 후에 편집하면 그만이었다. 사실 매끄러운 제작을 위해서는 사전에 섭외하고 동선을 파악하고 숙소를 잡고 비행기 티켓팅하고 현지 가이드와 차량 섭외 등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번엔 너무도 행복한 의뢰를 받은 셈이다.

대한항공에 몸을 싣고 우리 제작팀 4명( PD2, 카메라 1, 사진가 1)과 코이카 직원은 피지로 향해

출발했다. 파아란 물결에 바닥이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를 꿈꾸며 버텨본 비행이었지만 꽤나 긴 시간을 날아 피지에 도착했다. 나디 국제공항.

청명한 하늘과 바다와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땅을 밟아보고 수도인 수바로 이동했다.

서쪽에 위치한 공항 나디에서 수도인 수바까지는 대략 180킬로를 달려야 한단다. 그리 넓지 않은 길에서 트래픽 잼에 걸리지 않도록 빠르게 서둘렀다. 우리를 픽업하신 분은 한국의 여러 촬영팀을 코디했던 분이라서 모든 촬영 포인트를 숙지하고 있었고, 어디서 뭘 먹어야 하는지, 다 계획이 서있었다.


서쪽의 나디 공항과 동쪽에 위치한 수바
USP 대학과 학내에 설치한 태양광시설

코이카는 수바에 위치한 USP( The 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 대학에 태양광발전 시설을 지어주었고 클린에너지 연구를 지원하고 있었다. 다음날 태양광발전 시설의 테이프 커팅식을 촬영하고 연구소를 방문하는 것이 우리의 일정이었다. 피지는 대략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의 면적과 300여 개의 섬을 이루며, 90만 정도의 인구가 산다고 했다.

점심을 먹으러 바닷가에 위치한 식당에 들렸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때는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 풍습의 식인 종족이 악명 높았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격투기로 유명한 마크 헌트를 닮은 사모아계 체구의 원주민들이 눈에 띄었다. 영국의 식민지배로 영어를 사용하고 럭비 스포츠가 활발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인구가 얼마 안 되는 나라에서 세계대회에서 종종 우승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전투력이 가히 짐작되는 것 같기도 했다.


호텔 방 옆이 바로 바다였다


수바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방에 장비를 놓고 창문을 내다보니 바로 코앞이 바다다.

코이카가 잡아주는 숙소는 우리 제작팀이 자체 제작비를 들여 해외에 나가서 자는 호텔보다 늘 한두 단계 위의 수준이었다. 가끔은 전기와 길이 막힌 외딴 사막일지언정 그곳에서도 최선의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잘 정돈된 숙소는 긴 여정으로 지친 몸의 피로를 빨리 풀어 주었다. 항상 2인 1실에 익숙한 우리가 1인 1실을 경험한 것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과 같은 생경함이자 배려로 느껴졌다. 둘이서 룸 하나를 써도 상관없었지만 그 조직의 문화를 타인이 굳이 어필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날 USP 대학의 연구실을 촬영하고 그 대학 교수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한국에서 지원한 재원으로 장비를 구입하고 기술적 도움을 받아서, 해양연구와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했던 교수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인도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영국이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인도에서 많은 인력을 데려와 피지 땅을 건설했음을 대번에 짐작케 했다.

피지에 메인 캠퍼스를 둔 USP 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 대학은 상당히 독특했다.

1968년에 설립된 USP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태평양에 위치한 (쿡 제도, 피지, 키리바시, 마셜 제도, 나우루, 니우에, 솔로몬 제도, 토켈 라우, 통가, 투발루, 바누아투, 사모아) 12개국에 캠퍼스를 두고 이들 정부가 공동으로 소유한 대학이다. 초록의 잔디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캠퍼스는 파란 바다를 등지고 있는 아카데믹한 장소였다.

드디어 찾아온 신선한 저녁.

태양광시설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에 맞춰 한국의 대사와 피지 및 대학 당국의 귀빈들이 모였다. 피지의 언론기관에서도 많은 기자와 카메라 팀이 나와 분주했다. 피지 당국자가 한국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표했고, 이에 화답 키 위한 한국의 대사가 소개되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님의 약력은 화려했다. 그야말로 한국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고 고시를 패스해서 미국 대학에서 연수하신 분이었다. 축사의 메시지도 깔끔했고 영어도 매끄러웠다. 행사를 마치자 취재진의 인터뷰가 쇄도했고, 영어 질문에 막힘없는 답변을 이어갔다. 멋졌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의 무게와 권위가 풍겼다. 흠모의 눈빛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저분은 국가가 필요해서 선발하고 공부시켜 대사의 역할을 감당케 하는데, 저 역시 이 땅에서 하늘나라 대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제가 더욱 잘 준비되도록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날의 행사를 마치고 도심 주변을 스케치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모래사장과 파아란 하늘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영화 속의 풍경과도 같았다. 다만 그 공간에서 잠시라도 멍 때리며 누릴 시간이 없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피지의 골프장이 세계 몇 대 골프장 중의 하나라며 극찬하기도 하던데 역시 그림의 떡이긴 마찬가지였다. 블루라군의 촬영지를 찾아갈 시간도 없었지만 보이는 자연 그대로가 충분히 아름다웠음에 미련은 없었다.

촬영중인 일행과 가끔의 현지식


다시 이동해서 나디 공항 부근의 숙소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다.

아침 비행 스케줄 때문에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세상에서 처음 듣는 새들의 합창으로 정신이 번쩍 깨었다.

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호텔 주변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상쾌한 새벽 공기와 숲의 신선함에 뒤섞인 새들의 노래가 비현실적인 꿈결처럼 아름다움으로 밀려들었다.

잠시만이라도 이곳에 머물 수만 있다면......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공항으로 향한다.

호텔의 로비에서, 지난밤을 같이 묵었고 우리를 태웠던 대한항공의 승무원들과 마주쳤다. 꼬박 며칠을 이곳에서 쉬며 대기하다 다시금 우리와 같은 일정으로 돌아가는 스케줄이었다.


대기중인 비행기와 나디 공항 내부


'우와 세상에 이렇게 부러울 수가.......'

내게 반나절의 시간만이라도 주워진다면 너무도 좋겠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도 그때 그 대사님이 주신 강렬한 도전으로 인해 대학원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결혼하고서도 한참 동안

대학 학자금 융자를 갚느라 고생했는데, 대학원 융자 역시 꽤나 길게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마스크를 벗어젖히는 시간이 온다면 가족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러 다시 가고픈 나라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Q2yRDW2kM 피지 재생에너지개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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