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도 아닌 우리가 단지 그들의 짙은 피부색과 다르다는 이유로 신기해하며 몰려드는 것이 기이했다.
식당에서 나와서 잠시 길거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수 십 명의 사람이 금세 수 백명의 사람들로 불어났다.
순식간에 불어난 인파에 휩싸이자 당황스럽고 두렵기까지 했다.
'이 많은 인파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엄청난 인구가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2013년 1월, 우리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묵으며 코이카가 지원하고 있는 서쪽의 농업지역을 취재하고 있었다. 다카 시내는 경찰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노동자들의 결집을 막고 있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내내
경찰은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휘갈기며 모여있는 무리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가했다. 대다수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낮은 급료 및 처우개선을 위해 거리로 몰려나오는 중이었다.
대치중인 노동자와 경찰
저녁 퇴근 무렵에는 사람이 버스 바깥으로 터져나갈 정도의 포화 상태가 되었다. 닫히지 않는 문 밖으로 한 팔과 다리를 난간에 기댄 채 탑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는 외부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닳아 운행 자체가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1970년대 안내양이 승객의 안전을 살펴주던 그때 우리의 버스보다도 더 낡아 보였다. 시내 안팎에서 보았던 아프리카를 능가하는 아시아의 가난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러시아워에는 차량이 길을 가득 메운 채 도로가 주차장이 되었다. 그냥 서있었다. 육교 위에서 도시를 촬영하던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교통체증에 혀를 내둘렀다.
잠시 후, 도시가 떠내려갈 정도의 큰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거슬리듯 찢어지는 경고음은 하루 5번 무슬림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였고 연이어 기도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울려왔다. 도시 전체가 술렁이듯 어지러웠다. 이방인인 우리에겐 생경하면서도 자극적인 소리에 불안한 시간이었다.
막힌 도심과 노후된 차량
의류업, 그중에서도 직물 가공업이 '국부'(國富)로 불릴 정도로 2010년대 현재 방글라데시의 산업에서는 직물 가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하지만 그만큼 이면에 숨겨진 인권 유린과 노동 환경 문제도 큰데, 이런 문제가 2013년 4월 24일에 사상 최악의 건물 붕괴 사고라는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나무 위키-
방글라데시는 한반도의 2/3 크기에 1억 6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수도인 다카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보니 이런 모든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세계의 유명 의류 브랜드와 스포츠용품 제조사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방글라데시에 노동집약적 산업의 공장을 세웠고, 노동자들에게 밤낮 없는 노동을 요구한 것이다. 한때, 아이들이 아동노동에 내몰려 배움의 기회를 잃고 고사리 손으로 축구공을 만들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는 영토 자체가 다우지(多雨地)에 자리 잡은 데다 과도한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환경 훼손까지 겹쳐져서 엄청난 대홍수를 겪는 국가가 되었다. 연평균 1.6건이 발생하는 사이클론과 이 대홍수 때문에 하구의 비옥한 삼각지가 다 쓸려나가서 농업에도 큰 손실이 났다. 실제로 사이클론을 비롯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생한 최악의 인명피해는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했다. 1970년 11월 사이클론 '볼라'가 당시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와 인도 서벵골 지역을 강타했는데, 이때 발생한 사망자 및 실종자는 약 50만 명에 달했다.-나무 위키-
기상이변과 홍수 해수면 상승 등으로 매년 서울시 규모의 육지가 잠식당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다카에서 서쪽 라즈샤히 농업지대로 이동했다. 1년에 2 모작 이상이 가능한 농업지역에 안정적인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코이카가 지어준 태양광 시설과 지하에서 농업용수를 끌어오는 수도 시설을 촬영했다. 농부들은 여전히 소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소달구지와 자전거에 실은 짐
방글라데시에서 현지인들과 식사할 때면 나는 가급적 현지 문화를 따르고자 노력했다.
다카에서는 식당에 수저가 비치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외곽으로 나갈수록 상황은 어려워졌다. 가이드가 먼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한다. “식당에 가셔도 숟가락이 없을 수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우리는 일정에 쫓겨 눈에 띄는 데로 현지 식당에 들어섰다.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식당 안팎에서는 호들갑스럽게 사람 구경으로 인파가 몰렸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난다. 음식을 시키고 식사가 차려졌다. 제법 숟가락과 포크로 격식을 갖춘 식당이다.
그렇지만 나는 현지인과 동일한 방법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쌀을 모으고 얇은 밀가루 반죽을 뜯고 카레에 찍어서 입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닭다리도 손으로 북 잡아 뜯고 정신없이 허기를 달랬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뜨거움도 잠시 손을 빨아먹는 유아기적 즐거움을 한 것 맛보았다. 지역의 유지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나는 그들의 방식을 고집하며 식사했다. 현지인들의 눈빛에서 호의와 감탄 찬사와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일시에 그들의 방어기제가 해제되고 동질감 속에서 친근한 대화로 이어졌다.
나는 단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동참한 것뿐인데, 그런 모습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한다고 받아들였다. 마치 나의 외국 친구들이 김치와 고추장을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흐뭇하게 보던 나처럼......
태양광 시설과 급수시설
다카로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의 화장실을 들렸다.
호기심에 화장실 칸을 들어가 보니 쪼그려 앉는 변기에 휴지는 없고 수도에 연결된 비대용 호수 줄이 놓여있었다. ‘아 여기는 손을 사용하는 문화지’ 왼손은 용변 볼 때 사용하고 식사나 악수할 때는 오른손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