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과 오솔길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걷노라면 다리에 가해지는
육중한 압박감마저 반가웠다. 가끔은 해안을 따라 걸으며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걷는 길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아닌 군의 허가를 얻은 후에야 가능한
장소라는 것 때문에 더 설렜는지 모른다. 더는 북쪽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표시가
보이기 이전부터 인적은 드물고 숲과 나무와 물은 울창하고 명징했다. 산속의 물빛은 옥색의 신비스러움
그대로였고 바다의 빛깔은 물감을 뿌려놓은 파랑의 청량함이었다.
통일전망대를 오르기 전에 보았던 명파 해변의 색채는 그리스의 어느 바다에서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청명하게 아름다운 파랑의 물결이었다. 모래사장이 펼쳐 있지만 주간에만 잠시 한가로움을 즐기다 밤이면 출입금지와 경계로 가로막히는 금단의 구역이다.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 출입국 신고를 하고 차로 이동했다.
이런 절차를 거치는 동안 비로소 우리가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된 땅에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니 북녘의 산하가 뚜렷한 산봉우리와 섬과 바다로 펼쳐있었다. 해안을 따라 남과 북으로 이어진 철길과 도로가 눈에 들어왔고 금강산의 봉우리도 보였다.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해금강이 보인다. 날이 좋아서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포착되는 광경에 여러 감정이 올라왔다.
근 이십여 년 전에 방문했었던 금강산의 봉우리가 이렇게 지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새삼스럽고도 기이했다.
철로와 육로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송도와 금강산 봉우리 우측으로 보이는 해금강
남쪽에서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육로길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온정리에 내려서 마주 대했던 커다란 바위산과 봉우리를 다시금 남녘의 먼발치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여성해설사의 구수한 북한 뉘앙스가 스쳐갔고 정주영체육관에서 관람했던 서커스가 떠올랐다. 잔뜩 기대하며 다가갔던 해금강에선 그렇게 큰 감흥을 받지 못했었는데, 그때는 아마도 취재라는 일에 집중하느라 미처 자연을 감상할 만한 여력이 없었던 탓일 수도 있다.
3박 4일 정도의 관광일정을 마치고 북측 출입국 검사장을 거쳐 육로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육로라고는 하지만 길 양쪽이 철망으로 높이 올린 바리케이드로 둘러쳐져서 삼엄하고 을씨년스럽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좁은 도로였다. 그 길 바깥으로는 지뢰가 어떻게 매설되어 있을지 모를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땅이었다.
북측 안내원들과 말을 많이 석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이를 애써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라도 더 말을 걸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주변에 북측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팁이라도 더 쥐어 주려는 마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을 방문한 이후라 잠시나마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무드가 막 싹트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온정리를 중심으로 현대의 깃발 아래 금강산 관광과 개발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말로만 들었던 목탄으로 가는 차량을 보았고 2~30년 전쯤에서 멈춰져 있는 듯한 과거 도시의 현존을 목격했다. “고난의 행군”을 지난 시기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고단한 대중의 삶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2003년 초가을의 금강산에서, 나는 남북의 교류가 확장되고 철로가 이어져서 평화와 자유가 한반도에 정착되기를 소망했었다. 묘향산에도 가보고 북쪽 고향 땅에도 자유롭게 드나들고, 남쪽의 아름다운 섬과 평야도 구경하면서 대륙으로 이어지는 함께 행복한 한반도를.
남쪽 관광객들은 안내원 여성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어서 이것저것을 건네주었고
매번 “일 없습니다”로 화답하면서도 볼을 붉히며 감사함을 잊지 않았던 따스한 순간이 떠올랐다.
뉘앙스는 달랐지만 같은 말을 사용하기에 대화에 온기가 느껴졌다.
북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남으로 돌아오는 날 북에서의 통관을 마치고 잠시 화장실에 들렸다.
화장실 유리창 너머에는 북한군 위병이 총을 메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행들이 다 나가고
홀로 손을 씻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검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나지막이 외쳤다.
“동무 1불만 주시라요!”
나는 또렷한 그의 외침과 그의 눈빛과 나의 지갑을 떠올리며 묘한 긴장과 갈등에 빠져들었다.
마음은 손에 잡히는 데로 쥐어주고 싶었지만 그를 향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주변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금단의 선을 넘는 행위만큼이나 큰 값을 치러야 하는 결단 같이 느껴졌었다.
'세면대 위에라도 돈을 좀 올려놓고 나왔다면 마음이 편안했을까?
그 병사가 그 돈을 가지러 창을 넘어서 들어올 수는 있었을까?'
여러 생각이 오갔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고성의 숙소
화진포 바다
이제 겨우 동해의 통일전망대에 올랐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과거의 순간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이 애잔해졌다. 화진포를 거쳐 평화의 댐과 백마고지를 향해 걸을 것이고 임진각과 강화도
북단에서 북한을 내려다볼 예정이다. 때로는 걷고 때로는 차로 이동하는 길인데
첫날부터 너무 깊은 감정의 파고를 맞이하고 말았다.
일행들은 오래 걷는 중에도 힘들다는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늘 걷는 길이 아니고,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도로도 아니며, 인간의 접근이 금지된 곳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