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에 대해 중고등학교 시절 아마도 직립보행 때문이라고 배웠던 거 같다.
그 막연했던 정의, 그 정의는 이후 대학에 들어와 팸플릿 같은 작은 책에서 '노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진화하며 다른 세계관을 열어주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직립 보행과 노동은 다른 말이 아니었다.
네 발로 걷는 짐승이 직립 보행을 하며 자유로워진 두 팔로 무언가를 하게 되며 짐승의 세상과 다른 삶을 열어가며 지구라는 별을 자신의 것이라 자부하게 만들었던 시간에 다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 '직립 보행'은 또 다른 의미로 인간의 존재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386에서 586이 된 우리 세대에게 닥친 일상의 번거로움 중에는 이제는 우리보다 더 나이가 든 부모님 세대의 병치레이다. 함께 모시지 않더라도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또래들이 모이면 하나같이 하는 하소연 중 하나가 부모님들의 병구완, 그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허리' 통증이다.
각종 의학 기술의 발달로 오래 사시게 된 어르신들, 하지만 오래 사시는 만큼 다양한 노화의 징후들이 그분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 그중에 하나가 '허리' 통증인데, 기껏해야 오십 년을 살지 못했던 호모 사피엔스의 DNA를 가지고 그 두 배 정도의 기간을 살아가려니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허리는 이제 뼈와 뼈 사이를 지탱하던 연골이 닳아 없어지며 견딜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게 되고,
그래서 여러 가지 기막히다는 통증 치료 클리닉이 호황을 누린다. 연골 성분의 주사에서부터, 벌침에, 수술까지.
예전에 디스크가 생겼었다.
CT를 본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비용도 그렇지만 수술 자체가 두려웠기에 한의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각종 침과 뜸을 맞으며 통증을 완화시켰는데, 그때 의사분 왈, 결국 문제는 '근육'이라고, 뼈를 지탱하는 근육을 마련하지 못하면 제 아무리 좋은 치료도 결국 소용이 없을 거라고.
우리 몸은 근간이 되는 뼈대와 그 뼈대를 지탱하는 거미줄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 뼈와 뼈 사이를 지탱하는 근육의 노화로 인한 소실, 혹은 상실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근육이라는 건 결국 근본적으로는 '운동', 움직임이다. 걷고,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통해 여전히 뼈를 지탱할 수 있는 근육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부모님들의 문제는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나이가 드시면서 노화로 인한 근육의 상실, 하지만 예전만큼 움직이실 수 없으니, 근육의 재생이 쉽지 않다.
통증은 견딜 수 없지만, 그 통증을 견뎌낼 만큼 근육을 만들어 낼 의지도, 열의도 이젠 희박하며 버겁다.
그러니 용하다는 약과 시술을 전전하게 된다. 이미 수명이 다해버린 뼈와 근육을 약물로 버텨가는 시간, 그 시간을 지켜보고 케어해야 하는 자식들의 시간 역시 안타깝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 역시 그 '직립 보행'의 적신호가 깜박이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젊었을 때에 비해 몇십 근이 넘게 늘어버린 이른바 나잇살은 우리 뼈대에 무리가 된 지 오래,
허리가 아프다는 거야 여사가 되었고, 어느 날은 무릎이 아프고, 손목, 발목이 시큰거리더니, 급기야 노화의 대표적인 징후인 듣기도 생소했던 '고관절'이 말썽이다.
자고 깬 어느 날 아픈 손목으로 땅을 짚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래도 낑낑 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다 보니,
'직립 보행'하는 인간으로서 한계를 절감한다. 과연, 내가 얼마나 더 내 몸으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며, 새삼 '직립 보행'이라는 선연한 정의에 맞닺는다.
과연 난 얼마나 더 내 몸으로 버티며 살 수 있을까.
두 다리로 서서 내 삶을 스스로 일구어 나갈 수 있는 시간, 자신의 몸을 견뎌내지 못하는 부모님의 삶을 회의할수록, 그렇다면 난 이런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까란 막막함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뼈와 근육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결국은 자존으로 귀착되는 질문이요, 나이 듦에 대한 회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