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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Feb 28. 2020

#2. 한국 한국 한국

[르포 소설] 중독

 내가 하노이 국립대학에 다닌다고 하자, 마이의 이모는 놀라는 눈치였다. 

 “잘 됐구나. 세상이 참 좋아졌어! 아버지는 뭐 하시니?”

 나는 아버지가 한국과 무역업을 한다고 알려줬다. 내 입에서 ‘한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모는 눈빛을 번쩍이며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한국! 여기 까이랑에서도 한국이 아주 인기가 많단다.”

 나는 저 눈빛을 익히 알고 있다. 내 부모님도 똑같은 반응을 하는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정보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양국 수교가 이뤄지자 마자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에서 외국인들을 산업연수생으로 불러 기술을 가르치고 월급도 주기 시작했다. 우리 식구가 하노이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은 아버지가 한국에서 목돈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던 거다. 

 매월 아버지가 송금해 온 돈은 당시 베트남 노동자의 월급보다 수 십 배 큰돈이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 세 명의 가족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아껴서 하노이에 집을 사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부자가 많다면서, 베트남에서도 그럴 날이 곧 올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으로 땅과 집을 샀다. 우리가 몇 채의 집을 사자, 아버지는 이제 한국 물품을 보내줄 테니 내다 팔라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한국에 일했던 7년 동안 꽤 많은 돈을 모았다. 

 하노이로 귀국하고 나서 아버지는 한국 중고차를 수입해서 팔아 사업을 확장했다. 최근에는 한국에 노동자를 보내는 일도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무역업으로 바쁘기 때문에 주로 엄마가 도맡아 하고 있다.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남부 베트남 사람으로서는 큰 행운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은 항상 나를 지지해 주었고, 나 또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겪었던 아버지의 부재를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인생에는 오로지 돈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와 오빠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부모님은 항상 눈동자를 번쩍이며 ‘한국’이라는 단어를 말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향 친구의 집에서도 나는 똑같은 눈동자를 마주 하고 있다.

 “이 동네 여자들이 한국 남자랑 결혼을 많이 한단다. 여기 오면서 우리 동네에 새로 지은 집들 봤지? 그거 다 한국에 시집간 딸들이 보내준 돈으로 지였단다.”

 이모는 마치 일급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한국’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힘주어 발성했다. 그러고 나서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나는 방금 이 집으로 오면서 봤던 집들을 떠올렸다. 한국에 가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이모가 말을 이어나갔다.  

 “호찌민이랑 하노이에서 사람들이 온단다. 그 사람들이 차를 갖고 이 동네로 오니까, 그냥  따라가면 돼. 시내 호텔에서 맞선을 보면 된다고 하네. 돈 많은 남자들이라서 여기 가족들한테 매월 한국 돈 십만 원을 보내줄 수 있다는구나. 한국 돈 십만 원이면 여기 까이랑에선 큰돈이잖니. 얼마 전에 마이도 맞선을 보러 갔단다.”

 베트남에서 내 또래의 젊은이는 자유연애를 즐긴다. 그들은 중매결혼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내가 거주하고 있는 하노이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남부에서는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친구가 한국인과 중매결혼을 준비하다니 기가 찼다. 

 “정말이에요? 마이가 중매결혼을 한다고요? 언제요?”

 다그치며 따져 묻는 나 때문에 이모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동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국제결혼 중개업자를 따라갔다는구나. 마이가 빨리 돈을 모아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 마이가 엄마랑 이 집에 얹혀 지낸 지 벌써 20년이 다 됐잖니.”



 마이의 부모님은 마이가 어릴 적 헤어졌다. 가정형편이 풍족하지 못했던 마이의 엄마는 홀로 마이를 키우기 위해 새벽에 까이랑 시장에서 노점상을 했다. 까이랑 시장 중앙에는 불교 사원이 있다. 마이의 엄마는 불교 사원 입구 노점에서 갖가지 제례 용품을 팔았는데, 돈이 없다 보니 주로 싸게 도매로 구입해서 팔 수 있는 간단한 물건만 취급했다. 대부분 베트남 화폐단위로 이백 동 VND 이면 살 수 있는 저렴한 물품이었지만, 마이의 엄마는 그마저도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마이는 엄마와 함께 빵을 만들어서 팔았다. 마이의 엄마는 집이 없어서 여동생의 집에 얹혀 지내야 했다.      


“엄마가 마이를 먼 타향에 보내려고 하실까요?” 

 어린 조카더러 낯선 나라로 시집가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모의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마이 엄마가 반대해서 난리가 났단다…….”

 이모와 더 대화를 나눈다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았다. 나는 빨리 마이를 만나고 싶었다.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하는 이모를 뒤로하고 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맨발로 나를 따라 나온 이모는 집 전화번호라며 작게 접힌 쪽지를 내게 주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 쪽지를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집을 나와 까이랑 시장으로 가면서 나는 새로 지은 집들을 눈여겨보았다. 새집과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새집과 오래된 양철집이 마치 컬러와 흑백 필름처럼 대조적으로 줄지어 있었지만,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인상은 똑같았다. 새집이든 헌 집이든 모두 제대로 된 가구를 갖추지 않은 모습도 같았다. 새집의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철문 안쪽으로 조상의 복을 비는 작은 황금색 재단이 보였다. 돈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복을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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