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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Feb 28. 2020

#1. 까이랑, 내 고향

[르포 소설] 중독

 마이는 어릴 적 단짝 친구다. 하노이로 이사 오기 전 까이랑 Cai rang 에 있는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부모님을 따라 하노이로 이사를 왔다. 마이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연락이 끊겼다. ‘마이 Mai’는 ‘노란 살구꽃’을, 내 이름 ‘민 Min’은 ‘똑똑하다’를 뜻하는 베트남 여자의 이름이다. 나는 하노이 국립 대학교에 재학 중인데, 첫 작품으로 까이랑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됐다. 본격적인 자료조사를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하면서 나는 문득 마이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까이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이를 만나 보리라 결심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으로, 그리고 호찌민에서 까이랑까지,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마이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이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새로 지은 몇 채의 집이 눈에 띄었다. 원래 이 지역의 집은 벽돌로 짓지 않는다. 대부분이 양철판으로 사면과 지붕을 막은 단출한 단층 건물이다. 까이랑은 남부 지역에서도 소득이 낮은 곳에 속한다. 녹슬고 허술한 집 사이로 보이는 프랑스식 화려한 신축 건물이 낯설었다. 마이의 집이 있는 작은 골목은 새 건물이 유난히 많았다. 거리 전체에는 20채 정도의 집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6채가 새집이었다.      


 

 마이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마이의 이모가 자주색 꽃무늬 파자마 차림으로 선풍기 앞에 혼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모가 열린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너 민이 맞지! 얼른 들어오렴. 마이가 시장에서 올 때가 됐으니 기다리면 된단다.”

 마이의 이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모는 음료수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다. 날이 더워서 가방을 멘 등이 끈적거렸다. 나는 땀에 젖은 눅눅한 셔츠를 벗어 배낭에 넣고 검은색 민소매를 꺼내 입었다. 거실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액자 몇 개, 그리고 20년은 더 사용한 듯 낡은 텔레비전과 작은 소품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물건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시선이 낯선 사진에 머물렀다. 결혼식 기념사진으로 보이는 액자 속에서 마이가 보였다. 빨간 아오자이 Áo dài 를 입은 또래 신부 옆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초록색 연꽃이 그려진 노란색 아오바바 Áo Ba Ba를 입고 목에는 두꺼운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신랑은 시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부부 앞에 놓인 삼단짜리 웨딩 케이크 위에는 베트남과 한국의 작은 국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사진 속에는 마이 말고도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다. 그중 30대 초반의 남자는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 베트남 사람인 듯했다. 작은 신장에 통통한 편이었고 피부색은 밝았다. 50대 중반의 다른 남자는 회색 정장 차림에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뭐하고 지내니? 통 안보이더구나.”

 이모가 냉커피를 손에 들고 등 뒤에 서 있었다. 컵을 받아 들고 이모와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았다.

 “하노이에 살고 있어요.”

 냉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이모는 내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꼼꼼하게 흩어봤다.

 “우리 같은 남부 사람이 하노이에서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 싸워 독립과 통일을 완성했지만, 남부 사람에게 통일은 곧 패배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미국에 협조했으니까. 자본주의를 옹호했으니까. 통일된 후 우리는 낙인 때문에 당원에 가입할 수 없었다. 공산국가에서 당원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으로 미군을 도왔던 일부 사람들은 오랜 기간 별도로 관리받아야 했다. 그들의 자녀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공무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남부 사람에게 ‘하노이 입성’은 신기루 같은 거였다.     


글/ 사진: 박경주

포스터  출처: 하노이 여성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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