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일어나 밥을 한다. 엄마는 마감을 지키든 못 지키든 상관없이 해가 밝으면 아이를 씻겨 학교에 보내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 내 자식을 양육하고 기르는 일이 나의 일보다 앞서는 건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다.
성공하면 뭐 하나? 자식이 잘못되면 엄마에겐 절반의 성공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식의 앞길을 망친, 지독히 이기적인 엄마일 뿐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나는 더 많은 글을 썼을까?
엄마가 된 후로 지지부진한 작업들, 읽어내지 못한 책들이 쌓여만 갔다. 그래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그 어떤 작업보다 위대한 일이 아닌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글을 썼었다. 글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중략>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아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하는 역사가 여자의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한 일이 아닌지 물었다. 그러자, N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oo의 엄마가 아니라, 네 삶은 뭐니? 자식을 낳는 일 말고 네 삶을 살아! 이런 글 너무 화난다. 똑똑한 여자들이 지금도 어디선가는 아이를 다섯 명, 열 명까지 낳고 엄마로 죽어가. 여자의 삶이란 뭐니? 고작 엄마가 되는거? " 라고 질책했다. 나는 어머니도 아티스트도 아닌 그 어중간한 선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질책은 사실이었기 때문에뼈아프게 사무쳤다. 빛나는 재능과 미치도록 똑똑했던 작가들이 결혼 이후육아와 집안일에 묻혀작품을 이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악착같이 글을 쓰고 이혼을 했다. 평온한 결혼생활은 작가들을 갉아먹었다. 예술과 생활은 공존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생활이 갉아 먹혔으며 생활이 안정적이면 예술이 갉아 먹혔다. 나는 생활도 엉망이었지만, 어머니로써도 빵점에 가까웠다. 이것도 저것도 못된 어중간한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그렇게 도망쳐온 엄마의 자리에서 네 아이의 엄마인 최성임의 작품을 보고 눈물이 났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아티스트 최성임을 더 일찍 만났어야 했다.
나도 저렇게 커다란 테이블을 사서 아이들을 앉히고 글을 써야지...
사랑스러운 네 명의 아이들은 아티스트 엄마를 보면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작은 아티스트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성장한다.
아티스트 엄마의 집은 언제나 반짝이고 찐득하고 실뭉치로 가득하고 엉망진창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쉬지 않고 꾸준하게 작업했다. 최성임의 그 모습만으로도 아이들은 잘 자랐고, 넘치도록 엄마를 존경했다.
"엄마는 어디에 있든 항상 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 우리를 학원에 데리러 올 때도, 주말여행을 떠날 때도, 늘 차에 앉아서 실을 엮고 자르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냈다. 언제든, 어디에 있든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완성해 내곤 했다."
불 꺼진 아파트의 창틈에 해가 쏟아 오를 때까지 작업을 한다. 아이를 재우고 작가의 밤은 다시 낮이 시작된다.
발끝이라는 작품을 보고는 불안한 세계에 간신히 서있는 사람을 상상했다.
위태로운 사람이 작가일까? 아이들일까?
네 개의 사과와 하얀 테이블
미술관 한편에 마련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내가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면 나는 최성임의 작품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아티스트 최성임을 바라보는 네 아이의 시선으로 쓴 엄마가 아닌 아티스트, 최성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최성임의 작품보다 이 작은 책이 더 좋았다.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생생하게 네 아이 김서영, 김지헌, 김정민, 김지후 그리고 최성임이 썼다. 네 아이들은 엄마만큼이나 엄마를 사랑한다. 아니 엄마보다 더 엄마를 사랑한다. 나는 이점이 최성임을 대단하다고 느끼게 한다.
작가의 발끝은 위태로움을 내포하지만 사실은 네 아이의 잠든 발끝을 보고 만든 작품이다.
누가 누가 더 큰지 발끝을 내밀고 잠든 아이들의 고만 고만한 발끝은 사정없이 위태롭지도 아슬아슬하지도 않다. 연필심 같은 느낌의 뾰족함에 아이들의 웃음과 따뜻함 아늑함이 숨어있었다니...
하얀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침마다 사과를 나누어 먹으며 자란 작가의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엄마와 함께 작업하고 공부하고 자라난다. 나도 만약 이런 방법을 알았다면 이렇게 크고 넓은 하얀 작업테이블을 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만의 방을 가지려고 애썼던 지난 시절들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경력단절 20년이 아니라, 20년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였을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작가는 혼자서 작업하지 않았다. 네 명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처럼 쌓인 각설탕 껍질을 벗겼다.
엄마는 글루건으로 각설탕을 붙여 집을 만들었다. 수많은 각설탕이 모여 집이 되고 작품이 되었을 때 네 명의 아이들은 엄마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