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pe of breeze, 2024/이은선
"대 실망이야!"
오랫동안 좋아하던 Y와 4박 5일의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날,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온 말이었다.
비로소 나는 Y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계산은 내가 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니까.
모든 메뉴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코스로 짜여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는 처지니까. 내가 뭘 알아... 그녀의 모든 코스가 아름답겠지... 그녀의 친구들과 남편까지 만나는 건 고달팠지만 그녀가 좋았으니까 다 만났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급성 장염이었다.
나는 4박 5일 동안 나를 잃어버렸다. 병원의 하얀색 천장을 바라보면서 누워있자니, 뭐든 것이 실망스러웠다. 나도 Y도 다 실망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Y의 작업실을 떠났고 Y의 그림도 그녀의 선물도 편지도 광속에 처박아 두었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삶의 찌든 상황에서 Y를 만나는 건 수제맥주를 마시는 특별한 날이었다. 한 달 치 생활비를 하루에 다 썼다. 아깝지 않았다.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가게 만들어줬으니까.
나는 신데렐라처럼 12시가 되기 전까지 Y의 삶 속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러자 Y를 삐딱하게 보던 달희가 말했다.
"난 그렇게 유별나게 옷 입는 사람은 딱 질색이야"
내가 Y의 전시회에서 사 온 그림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너 같은 가난뱅이한테 이런 엉터리그림을 팔아먹는 걸 보니 사기꾼이라고 한탄을 했다. 나는 그때, Y를 <사기꾼>이라고 말한 달희의 프레임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만난 가장 선량한 사람이야, 네가 뭘 알아? 그렇게 말하지 마."라고 말하자, 달희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야, 이따위 그림을 돈을 받고 파는 것 자체가 사기꾼이지..."
"내가 산 거야, 억지로 팔아먹은 게 아니고..."
나는 달희를 한동안 피했다. 나는 Y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전시회를 하고 책을 내고 뭐든 맘먹은 대로 하는 사람. 인플루언서 influencer Y. 그러나 달희는... Y의 모든 게 하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바보 같다고 했다.
바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시원하다고 피부로 숨구멍으로 느꼈을 뿐이지...
그런데, 간단하게 천을 씌워놓고 보니 천을 뒤집어쓴 바람의 모양이 보였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왜 그렇게 펄럭이는지,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왜 그렇게 요동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이 갑갑스러울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하늘높이 올라갔다가 땅끝에 낮게 비명도 없이 떨어졌다.
바람은 나무도 꽃도 고양이도 나비도 치맛자락도 머리카락도 가리지 않고 온통 흔들었다.
'너는 누구를 이렇게 흔들거리게 한 적이 있어?'라고 바람이 물었다.
나는 Y에게도 달희에게도 늘 흔들리기만 했다. 나는 누구를 흔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잖아...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그저 천에 불과했으나 바람이 찾아오면 신이 내려온 듯 천하가 요동쳤다.
나는 바람을 따라 흔들거리고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러나 때론 흔드는 이보다 흔들거리는 천이 더 아름답다. 흔들거릴 줄 아는 천이 있어서 바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은 내가 바람과 함께 요동쳐야 한다. 그래야만 바람을 가둘 수 있다.
'함께 흔들거릴 수 있어서 Y도, 달희도 네 곁에 있던 거야. 너무 실망마.'
그날, 무척 실망한 나에게 소다의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였다.
이은선/shape of breez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