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와 할머니
‘오늘도 망했다.’
체육이 끝나고 너무 목이 말라 물을 벌컥벌컥 마신 게 화근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학교에서 물을 많이 안 마시는데,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아침에 먹은 오이지 때문이었을까? 입안이 바싹 말라, 결국 두 컵이나 들이켰다. 다 마시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변영수, 쉬는 시간에 뭐 하다가…….”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용해진 교실 구석에서 누군가 킥킥거렸다. 내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젖은 바지를 입고 움직일 수도 없어,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한 참 후에, 교실 문이 살짝 열리며 할머니가 나타났다. 꽃무늬 몸배바지 위로 낡은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달려오셨는지 국밥 냄새와 장터의 기름내가 따라 들어왔다. 할머니는 난처한 얼굴도,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나를 보며,
“영수야, 괜찮다잉. 사람 사는 거 뭐 있냐, 누구든 한 번씩 실수 허는 것이여잉!”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머니의 손에 들린 바지와 팬티가 부끄럽게 흔들렸지만, 그 부끄러움 속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할머니”
할머니를 보자, 미안한 맘과 설움이 올라와 눈물이 쏟아졌다.
“괜찮어잉. 근디 영수야, 왜 학교만 가믄 오줌을 싸불어? 생긴 건 멀쩡허구만. 머슴애들이 니 괴롭히고 꼬추 맨지고 그라디? 그래서 화장실을 못 가불어? 이 썩을 것들이 할매랑 산다고 놀려 댄 것이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여잉. 안 봐도 비디오여. 사내놈들이 짓궂게 굴어 부렀을 것이제, 허냐?”
“아니라고요! 할머니! 난, 왜 변 씨예요?” 나는 다짜고짜 할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할머니는 내 등짝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후려쳤다.
“에구 답답허다잉! 니 맹꽁이가? 니는 그리 잘 생겼으면 광을 손아귀에 쥐고 태어난 것이여. 할미가 광이 셋이면 노름판에선 게임 끝이라잉. 안 그렇것냐?”
“광은 무슨 똥 껍데기겠죠!”
나는 공연히 할머니에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맞은 등짝 때문인지 눈물은 쏙 들어간 대신 등짝이 화끈댔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 어깨를 ‘탁’ 치면서 깔깔대고 웃어댔다.
“니 제법이여잉. 할미도 광보다는 껍데기가 좋다. 봐라잉, 광은 운 좋은 놈들이 다 차지한당께. 근디 껍데기는 아무나 받어. 그걸 잘 모아 열두 장만 맹글면 그때부턴 쭉쭉 점수가 나불제. 그게 얼마나 신나고 재밌는지 아냐잉? 우연히 들어온 행운의 광보단, 니 손에 든 패를 부지런히 모아 점수를 내는 게 진짜 실력이여.”
“할미도 나를 껍데기로 생각하잖아요!”
“뭐든 말여잉, 타고난 재능이 없당께도 꾸준허면 언젠간 빛이 나는 것이여. 그 빛은 우연히 들어온 광이랑은 비교도 안 돼잉. 공부든 태권도든 다 그라제. 니는 매일매일 이 닦고 잘 자고 밥 묵고 일기부터 쓰랑께. 언젠간 꼭 빛이 날 것이여.”
할머니는 뭐든 화투에 빗대어 이야기했다. 그 말들은 늘 알쏭달쏭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꾸.준.히.” 할머니가 가장 자주 쓰던 말. 그래서일까, 아빠의 이름도 준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