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에 관해- 미술여행 1
매너리즘에 관해
목적지는 바르셀로나였지만 내 몸은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있었다. 바르셀로행 직항 편이 있다는 걸 마드리드 숙소에 도착해 알게 되었다. 한숨이 나왔다. 삼십 중반을 지나는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서른다섯이 되면 나는 안정된 직업에 결혼도 하고 아이를 가진, 그저 평범한 삶, 불안이 없는 삶을 지나고 있을 줄 알았다. 생각처럼 삶이 되었다면 난 해리포터 마법학교를 졸업하고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겠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삶의 얼굴이 변할 뿐이었다. 이십 대 불안은 종식되지 않고 배속 체지방처럼 삶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일, 관계, 사랑 모든 게 불안했다. 홀로 스페인을 떠난 것도 현실에서 잠시 불안을 잊기 위한 야반도주 아니었던가. 떠남이 해결책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음에도.
마드리드에 도착해 진한 커피를 마신 뒤, 바로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이나 실컷 보고 푹 자고 싶었다. 시차 때문에 멍한 상태로 그림을 보니 잠이 밀려왔다. 그때 한 작품이 잠을 깨웠다. 매너리즘 대표 화가이자 스페인 3대 화가 인 ‘엘그레코’의 작품이었다. 3대 거장이라지만 그의 그림 앞은 몇 사람 없었다. 우둑허니 서서 그림과 대면했다. 구도는 불안했고 몸은 8등신을 넘어 10등신에 가까웠고 손가락은 과도하게 길었으며 색채는 무채색에 어두웠다. 어딘가 괴기하고 기하학적까지, 그림이 슬퍼 보였다. 마치 불안 가득히 떠나온 홀로 여행자인 나의 풍경 같았다.
매너리즘은 부정의 언어가 아니다. 아픔의 언어다.
매너리즘, 보통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으로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어버림을 뜻한다. 매너리즘은 미술사에서 파생된 의미로, 보편적 의미와 미술사 의미는 조금은 다르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미술 사이에 있는 미술 사조다. 르네상스 시대는 미술의 암흑시대라 불리는 천년 종교 세상을 거부하고 인간 중심 사회로 회귀한 시대를 일컫는다. 거장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 작가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의 목표는 자연에 대한 정확한 모방에 있었다. 수학과 과학 발달은 예술가들을 그림과 조각 등으로 정확한 자연 모습을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결국 시대 목표는 르네상스 후기 작가 라파엘로 의해 해결되었다. 정확하고 안정된 구도, 정확한 인체 표현, 인문학적 내용을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천재적인 실력으로 그는 왕실과 교회의 지원을 받고 엄청난 부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그는 여인들의 시랑을 독차지했고 남성들에게는 화산 같은 질투심을 폭발시켰다. 명실상부 르네상스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지금의 BTS라고 하면 될까?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후대 화가의 목표는 르네상스가 아니라 라파엘로를 넘어서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라파엘로의 천재적 실력을 어느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로마를 넘어 유럽 화가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이상하게도 라파엘로에 의해 목표가 달성된 후 화가들은 아름다움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연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인체는 길어지거나 짧아지고 색채는 어두워지면서 구도는 불안정해졌다. 르네상스가 생명, 빛을 그렸다면, 매너리즘은 죽음과 어둠을 그렸다. 르네상스가 화창한 봄날이라면 매너리즘은 태풍이 몰아치는 나날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매너리즘을 르네상스 미술에 안주한 후퇴한 미술이라 폄하했다.
우린 여전히 아프고 불안하다.
왜 그들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을 선택했을까? 비단 라파엘로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을까? 라파엘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해가 점점 저물어 갈 무렵, 스페인과, 독일, 프랑스가 로마와 전쟁이 일으켰고 반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급격히 뒤숭숭해졌다. 세기말 분위기가 바이러스처럼 유럽 전역을 뒤덮었다. 생명 불안을 느낀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아름다움은 사치이자 거짓 일 뿐이었다. 그들은 시선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돌렸다. 르네상스가 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면 매너리즘은 내적인 불안을 표현한 인간사의 최초의 미술이다.
희망과 목표를 잃어버린 불안, 실존에 대한 불안, 자존의 상실, 수 백 년 전 그들의 불안과 지금 우리의 불안은 왜 이리도 닮았을까. 지금, 외부가 아니라 내부, 상처 받은 마음을 더욱 사랑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난 그들처럼 오늘도 불안하다.
그대도 매너리즘인가요?
-엘그레코 (1541년 ~ 1614)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스페인 궁중화가로 활약했다. 대부분 그림이 종교화와 초상화 였다. 어두운 색체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가 특징이다.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절하되었지만, 19세기에 재평가 받았으며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