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끝 말레꼰
하바나의 골목
서서히 지는 해는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작은 골목을 비추었다. 스페인 풍 건물들은 파스텔톤으로 화장을 곱게 했지만 빛바랜 페인트는 나무껍질처럼 보였다. 어떤 집 낡은 창문은 곧 떨어질 거처럼 아슬아슬했다. 거리 곳곳에는 석공이 깬 거 같은 벽돌들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영원히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는 표정처럼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새벽배송을 기다리는 거 마냥. 70년대 초록색 클래식카가 툴툴 거리며 지나갔다. 세월이 시간에 절어 멈춰버린 풍경. 무미건조한 다큐멘터 필름 같은 풍경이었다.
무작정 걸었다. 아름답고 남루한 거리가 나를 계속 걷게 했지만, 사실할 수 있는 게 걷는 거밖에 없었던 터였다. 와이파이도 안되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변변한 카페도 없었다. 고독한 남자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솔직히 지긋지긋하게 외로웠다. 홀로 떠난다는 거, 혼자가 되는 일. 세상 이런 진상, 지랄 맞는 일도 또 없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잡아 걸쭉한 랩 혹은 폭포처럼 시원한 창이라도 한 곡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무치게 누군가 보고 싶었다. 그립고 그리웠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골목 끝에 바다가 나타났다.
보고싶다. 그립다. 사무치다. 말레꼰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뜻의 '그립다'. '사무치게 그립다'는 그리움이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친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 한 적이 있는가? 보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 깊이 스며들어 심연 끝까지 닿을 정도로 그리워한 적이 있는가.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세월을 놓지 못한 적이 있는가. 그 마음이, 그 시간이 결국 바다를 만난 적이 있는가.
시간을 뭉개버린 아바나의 골목 끝에는 말레꼰이 있었다. 말레꼰은 아바나 구시가지 끝자락에 있는 방파제다. 아바나 시를 거센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8km에 달하는 거대한 방파제. 아바나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한 곳인데, 구시가지 어느 거리를 걷든 서쪽으로 가면 말레꼰으로 이어진다. 쿠바인을 위로나 하 듯 세상 끝에 말레꼰이 있다. 이곳은 아바나 시민들의 휴식처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산책하는 시민, 노래하는 무명의 가수, 수영을 하는 아이들, 낚시하는 노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방파제 한적한 어귀에 앉았다. 한 커플이 옆으로 와 앉아 거침없이 키스를 하다 바다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말레꼰에서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그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짜증 또한 밀려왔다. 길고 긴 방파제 중에 왜 내 옆에서 사랑질인가.
내 마음을 아는지 마는지 지는 해는 말레꼰을 붉은빛으로 물들였고, 파도는 세상 마지막인 거처럼 끊임없이 제 몸을 말레꼰에 던졌다. 파도 때문인지 붉은 말레꼰은 식어갔고 곧 어스름이 내렸다. 어두워지는 바다를 한 없이 바라보았다. 사무치는 외로움이, 사무치는 그리움이 저 먼바다 끝에 닫기를 바랬다. 마음을 바다가 알아주길 바랬다. 그리고 바다 끝에 그리움을 놓아주고 싶었다.
말레꼰을 사랑하기 좋은 곳이라 말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세상 어딘들 아름답지 않을까. 말레꼰은 혼자되기 좋은 곳이다 . 혼자가 되어야만 진심으로 타인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 있다. 혼자가 되어야만 진심으로 후회를 할 수 있다. 마음속에 꽁꽁 숨겨져 시큼할 정도로 숙성되어버린 그리움, 미련, 후회를 꺼내어 볼 수 있는 곳이 말레꼰이다.
온갖 사연을 품은 골목 끝에 바다가 있을 거처럼 그리워하자. 곧 부서져 소멸될 파도라도 영원히 그자리에서 파도를 껴안을 말래꼰처럼 그리고 말레꼰의 연인들처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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