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을 주는 이야기의 인지과학적인 힘에 대하여
정치인의 연설에 마음이 움직인 적이 있는가?
강연자, 설교자, 발표자의 스피치에 마음이 움직인 적이 있는가?
어떤 부분이 당신의 마음을 진동시켰는가? 어떤 부분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인지심리학적으로는 그들의 연설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과학자인 나는 연설하는 도중에 나온 연구 데이터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아 움직였길 바라고,
연설자의 타당한 논리 전개와 권위있는 학자의 의견이 당신의 기억 속에 남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기대를 충족하는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교수생활 초기에 학생들에게 과학적 연구결과를 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던 나는
매시간 고전적인 연구결과와 최신 연구결과 풍부하게 수록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학생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데이터만 쳐다 보면서 말하고, 혼자 웃고 떠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한 학기의 중간쯤이 되어갈 무렵, 내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싸~' 했다. 무서웠다. 학생들이 나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열심히 과학적 데이터를 전달했지만, 사실 아무 효과가 없었구나.'
'아. 과학적 데이터를 전하면서 신났던 건 나 혼자 였구나. 나만 신났었던 거였구나.'
이어서 고민했다.
'아. 진짜 어떻하지. 어떻게 해야 이제부터라도 강의를 살릴 수 있을까.'
일단 인기있는 대중 강연자들의 강의를 들어보기 시작했다.
교수님들 중에서도 TV에 자주 나오는 분들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콘텐츠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20개 넘는 콘텐츠를 봤을 때쯤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강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인기가 있는 강연자는 대부분 '이야기'로 시작을 했다.
일상의 이야기, 영화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책 이야기, 사건사고 이야기, 옛날 이야기 등등.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살짝 언급했다.
연구의 방법을 길게 언급하거나 세세한 사항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연구의 조건들과 그 조건들별로 나타난 결과를 재미있게 비교하여 설명해주었다.
연구 논문에 나온 전문적인 용어들을 대중들이 이해쉬운 말과 예시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교훈을 전달했다. 뭔가 인사이트가 될만한 말을 결론으로 언급하면서 강의가 끝났다.
누군가의 명언일수도 있고, 강연자가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는데, 그 말이 계속 여운에 남았다.
뒤돌아보면, 나는 이런 인기있는 강연자들이 사용하는 스피치의 맥락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연구, 데이터, 과학, 연구방법, 어려운 말로 도배된 PPT를 가지고,
학생들이 알아서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강의하는 나만 만족스럽고, 듣는 사람은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은 강의를 했으니,
표정들이 좋을리가 있겠는가.
나는 이런 깨달음을 바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PPT를 다 뜯어 고치지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문제에 봉착했다.
뭐냐고? 내 머릿속에 다양한 이야기 소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연구결과들은 많았는데, 정작 그 연구결과들을 풀어내기 전에 언급할만한
이야기 소재가 거의 없었다.
'우와. 내가 정말 헛똑똑이였구나. 내가 공부를 정말 안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러워졌다.
훌륭한 강연자들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들인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하는지.
이야기 소재를 찾고, 이야기 소재를 가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독서를 하는 사람들인지
마음 깊이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도 이야기 소재를 찾는 공부와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랍시고, 드라마도 잘 안보고, 예능 프로그램도 잘 안보고, 참고문헌없는 책도 잘 안보고 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짓이고, 교만한 짓인지 알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소재를 찾기 위해서는 드라마도 봐야 했고, 영화도 봐야 했고, 예능 프로그램도 봐야 했다.
참고문헌 없는 책들도 알아야 했다.
이렇게 한 3달쯤 했을까? 아주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를 이야기하기 전에 언급한만한 이야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학적인 데이터를 전달하기 전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예화들이 갖춰지게 되었다.
그렇게 PPT 대공사가 차츰차츰 이루어졌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과학적 데이터를 쉽게 풀어 간략히 전달하면서 확신을 주고,
교훈, 시사점, 인사이트를 전달할 것.
언제부터 시작된 좋은 강연의 공식인지 모르겠으나,
이 공식대로 따랐더니 최소한 망하는 강의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좋은 강의 공식은 뇌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치인의 연설, 대중적 강연, 종교적 지도자의 설교, 신제품을 설명하는 CEO의 스피치에는 모두
대중들이 크게 공감하는 이야기가 들어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뇌에서 공통된 반응이 있었던 것이다.
뭐냐고? 감동적인 강연이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뇌의 감정 센터라고 할 수 있는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있었고, 심지어 편도체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일치했던 것이다.
편도체가 활성화되었다는 것 자체는 인간의 감정을 움직였다는 의미이고,
편도체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여러 사람에게서 동일했다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였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증거도 확인할 수 있다.
공감가는 연설이나 강연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가 비슷해지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강연이나 연설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했던 생각이 비슷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강연이나 연설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뇌과학적으로 볼 때 공감가는 이야기가 있는 연설이나 강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감동을 주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도록 유도할 수 있다.
혹시 과학적 데이터나 연구 결과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무장하고 있던 사람이 있는가?
진정하라. 내가 다 해봤는데, 안된다.
공감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라.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뇌가 같은 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야 한다.
데이터는 그 다음이다.
데이터에 대한 설명은 길게 하지 말라. 간단하게 전달하고, 무슨 의미인지 해석해주는데 신경쓰라.
데이터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면, 뜨겁게 달아 올랐던 사람들의 뇌가 식어버릴 것고, 전달력이 떨어질 것이다.
좋은 이야기 하나가 과학적 데이터 100개보다 낫다.
*참고문헌
Schmälzle, R., Häcker, F. E., Honey, C. J., & Hasson, U. (2015). Engaged listeners: Shared neural processing of powerful political speeches. Social Cognitive and Affective Neuroscience, 10(8), 1137-1143.
*표지 그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