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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Apr 03. 2024

이야기와 뇌 과학

기억 시키고 싶다면,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자

사람들은 말한다. 이야기는 힘이 있다고.

누가 이 말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창조 신화로 하나 된 사람들이 뭉쳐 거대한 민족을 이루고,

자신들을 곰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라를 세우며,

자신들을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스파르타 최강의 전사를 키운다.

용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는 용의 아들로 불리는 지도자를 세우며,

천신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는 하늘의 아들, 천자를 황제로 세운다.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각종 의혹과 소문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야기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을 뭉치게 만들고,

그렇게 뭉친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함을 알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프로그램과 세계사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현대사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전해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동시간대 최고인 것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준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일제시대 이야기를 전문가 혹은 전문MC가 들려준다는 점만 다르다고 할까.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한국전쟁 이야기를 아나운서 출신MC, 개그로 단련된 연예인,

연기력 좋은 배우가 실남나게 들려주고,

삼촌이 말해주던 민주화 혁명의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꾼들이 전해주니 눈이 가고, 귀가 간다.


범죄 사건이나 수사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귀신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 최고다.

인기 있는 강사들은 단순히 전문 지식으로 가득하기에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풍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의 소재가 마르지 않도록 공부를 계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학 교수들은 연구 모드와 강의 모드라는 서로 다른 모드를 적절히 발동시켜야 하는데,

어떤 모드를 발동시키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같다.

연구를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현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연구의 동기나 배경을 얻어야 하고,

강의를 하더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부터 그날 다룰 주제의 강의를 시작해야 한다.

세상 이야기를 다루지 못하는 연구는 그 분야 동료들의 검토와 심사를 통과되지 못할 때가 많고,

세상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강의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때가 많다.


그래. 이야기를 해야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렇게 좋아한다니, 우리 모두 스토리텔링을 하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끝내고 싶은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직업병이 도져서 도저히 못 끝내겠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내가 궁금한 건 왜 이야기를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의 답이다.

안 궁금하다고? 누가 물어봤냐고? 미안하지만, 직업병이라고 어쩔 수 없다.

심리학이 본디 그런 학문 아니던가. 왜 그런지 계속 묻고, 답을 찾고, 또 묻고, 또 찾고.

너무 다행인 것은 이런 질문을 했던 사람이 이국희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선배님들 중에 이미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었고, 연구도 열심히 해놓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심리학적인 이유, 그 첫 번째는 이야기는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무미 건조한 보고서나 통계 자료, 그래프, 연구 논문은 재미가 없다. 왜냐고?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솝 우화, 흥부와 놀부, 홍길동전, 범죄 사건, 귀신, 음모와 배신, 사랑 이야기는 감정을 자극한다.

이야기에는 기쁨과 슬픔, 흥분과 긴장, 공포와 놀람, 따뜻함 혹은 포근함, 흥미진진함, 웅장함, 전율을 준다.

이야기와 논문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논문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있지만, 세상 전체로 봤을 때는 그렇게 큰 힘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을 자극해주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지, 감정을 배제시킨 논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뇌가 이야기를 기억하는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시험 문제의 정답을 맞추기 위해 그냥 막 외우는 것을 가장 기억하기 어려워한다.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인지심리학적으로 너무 명백하다.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이 우리 뇌가 가장 싫어하고, 기억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공부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모든 과목이 스토리텔링이 되어야 한다.

문제 풀이하고, 시험문제 정답 맞추게 하기 말고,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시킬 수 있다.

우리 뇌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앞뒤 맥락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저그런 집중이 아니라, 강력한 주의집중력이 발휘된다.

무작정 영어 단어 외우려고 할 때는 그렇게 외워지지 않더니,

재미 있는 미국 드라마에 나온 단어는 문장까지 금새 외워지는 현상에는 이러한 인지과학적 원리가 존재한다.

수학도 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가르치고, 교과서를 개발할 수 없을까?

과학도 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가르치고, 교과서를 개발할 수 없나?

미술도 음악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가르치고, 교과서를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육부가 할 일이 이런 것 아닐까?

쓰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엉뚱한 것들 사는 것에 돈 쓰지말고, 이런 본질적인 것에 투자했으면 좋겠다.


우리 뇌가 이야기를 잘 기억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감정을 자극한다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감정은 우리 뇌 입장에서는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이다.

감정이 없는 일은 우리 뇌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감정이 개입된 일이 우리 뇌 입장에서 대부분 중요한 일이고, 기억할 필요가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뇌는 감정이 개입된 이야기에 강한 주의력을 투입하고,

이야기를 저장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쓴다.


이처럼 이야기는

"감정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향상시키며, 기억력을 강화하는 뇌 과학적 도구이기에"

그 힘이 강력하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만 봐도 이야기의 힘이 느껴진다.

연구 내용을 지루하게 설명했던 과거의 이국희와 만났던 학생들은 다들 졸더니,

세상 이야기를 해주는 지금의 이국희와 만나는 학생들은 다들 눈이 초롱초롱 깨어 있다.

(심지어 1교시 수업인데!)

아고.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


인지심리학 시험 보는 것은 아니니 이야기의 인지적 힘을 외우실 필요는 없다.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러가 된다면, 이런 원리를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테니 말이다.

우리 모두 이야기꾼이 되어 보자.


*참고문헌

Schmälzle, R., Häcker, F. E., Honey, C. J., & Hasson, U. (2015). Engaged listeners: Shared neural processing of powerful political speeches. Social Cognitive and Affective Neuroscience, 10(8), 1137-1143.


*표지 그림 출처

사진: UnsplashHümâ H. Yardı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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