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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un 05. 2024

첫 소절, 첫 장면, 첫 인상

시작이 전부가 되는 현상의 뇌과학적 이유를 찾아서

나는 뛰어난 신인가수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뭔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오디션 도전자들의 땀, 눈물, 웃음에서 인생을 배우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고,

재능과 노력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배우고,

재능을 뛰어넘어 버리는 노력의 위대함을 배운다.


그러나 인지심리학자인 내가 오디션 프로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여기는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오디션 심사위원들의 태도와 심사평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악적 감동, 예술적 감동을

언어로 변환하여 평가해야 하는데,

이 어려운 일을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해내는지가 너무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음악적 감동을 표현하기 위한

오디션 심사위원들의 정형화된 수사법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뭐냐고?

'첫 소절 들어갈 때, 끝났어요.'
'첫 소절 들어갈 때, 소름이 쫙 돋았어요.'
'첫 소절 들어갈 때, 전율이 일었어요.'

이것이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금세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소절 들어갈 때'라는 표현말이다.

오디션 심사위원에 따라서는

'첫 시작이 진짜 어려운 곡인데, 너무 훌륭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첫 소절에서 감동을 주는지 아닌지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말이다.

첫 소절에서 감동을 준 도전자은 끝날 때까지 감동을 주고,

오디션의 다음 단계로 올라갈 기회를 얻지만,

첫 소절에서 감동을 주지 못한 도전자는 결국 끝까지 감동을 주지 못하고,

박한 평가를 받아 탈락한다.


연기 오디션도 마찬가지다.

첫 대사를 하는 순간, 오디션 심사위원은 판단을 내린다.

심지어 첫 대사를 들어보고, 계속 들어볼 사람과

'됐습니다. 나가세요'라고 말할 사람을 선택해 버리기도 한다.

첫 대사 들어보면, 그가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오기에 뒤에 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소리다.

드라마의 첫 화가 시청률에 얼마나 중요할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첫 화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드라마는 사실상 실패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의 첫 3분내지 5분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고, 흥행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첫 인상의 효과다.

첫 인상이 좋으면, 그 첫 인상의 후광이 끝까지 가면서

모든 것이 좋아지지만,

첫 인상이 나쁘면, 그 첫 인상의 어둠이 끝까지 가면서

모든 것이 나빠진다.

남녀 관계가 애인으로 발전할지 아닐지도 사실상 첫 인상이 결정할 때가 많다.

첫 만남에서 호감을 주고, 대화가 통해야 다음도 있는 것이지,

첫 만남에서 호감과 통하는 대화 소재를 감지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첫 인상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뒤에 이어질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커다한 영향을 지니는 것일까?

특별히 우리 뇌 입장에서 첫 인상은 어떤 효과를 가질까?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연구진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오랜 연구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 인상에서 감동을 받으면,

우리 뇌가 계속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지만,

첫 인상에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면,

우리 뇌가 급격히 식어 차가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첫 소절에서 감동을 받은 오디션 심사위원의 뇌는

뜨겁게 달아올라 지속적으로 감동 받기 쉬운 상태로 변한다.

이미 전율 온도가 충분히 올라 있기에 조금만 감동이 추가되도

전율이 오는 임계점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등장하자마자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은

별것 아닌 동작과 말 하나에도 계속 웃음을 주지만,

등장하자마자 웃음을 주지 못하는 코미디언은

웃음을 쥐어 짜내도 웃음을 주지 못하는데,

이것도 등장부터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이

청중의 뇌를 뜨겁게 달구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미 재미 온도가 충분히 높아져 있기에 조금만 재미가 추가되어도

웃음을 주는 임계점을 쉽게 넘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도 그렇다. 첫 장면에서 몰입감과 흡입력을 주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변화와 반전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몰입하고, 빨려들어간다.

우리 뇌가 이미 몰입 임계점에 가까이 도달해있기 때문에,

살짝만 건드려주어도 임계점을 넘어 몰입하고, 빠져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는 이제 '예고편'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고,

어느 제작사던 예고편에 상당한 노력과 자원을 투입한다.

왜 그럴까? 예고편부터 사람들의 뇌를 임계점 가까이,

더 나아가 임계점 너머로 달구기 위해서다.

예고편에서 감동을 주면, 영화나 드라마의 첫 장면이 약해도

쉽게 감동 받을 수 있고, 영화나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들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첫 인상에서 감동을 주는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감동 받을 상태가 되게 만든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감동을 주어도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감동의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첫 소절, 첫 장면이나 예고편, 첫 인상에서

심사위원이나 상대방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우리 뇌는 차갑게 식어 간다.

어느 정도 따뜻해져 있는 것은 적은 열만으로도 금방 뜨겁게 만들 수 있지만,

차갑게 식어서 꽝꽝 얼어버린 것은 오랜 시간 강한 열을 쪼여도

잘 녹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려고 할 때, 들으려고 할 때, 느끼려고 할 때,

'쫙-!'하고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식어버린 후에는 아무리 불을 쪼여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일반인들이 나오는 연애 프로그램에서도 많이 나오는 장면 아니던가.

첫 데이트를 실패하면 그 다음에는 회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말이다.

첫 데이트에서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 다음은 없다.

이미 마음이 떠나고, 차갑게 식어 버린 것을 다시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씨가 살아 있을 때는 불을 살릴 수 있지만,

불씨마다 완전히 꺼져버린 후에는 불을 살릴 수 없음과 같다.


성공하고 싶은가?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인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감동을 줄 수 있는

첫 소절, 첫 장면, 첫 인상을 준비하고, 연습해보자.

똑같은 대사를 해도 배우에 따라 맛이 전혀 다른 것처럼,

똑같은 것을 설명하더라도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연습해보자.


나도 더 열심히 연습해보려 한다.


*참고문헌

Stephens, G. J., Silbert, L. J., & Hasson, U. (2010). Speaker–listener neural coupling underlies successful communicati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7(32), 14425-14430.


*표지 그림 출처

사진: UnsplashOleg Iva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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