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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철 Oct 19. 2022

7월

30살이 되다니







  여름엔 벌레, 더위, 장마가 있다. 모두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다. 덥고 비 오는 날 벌레가 나오기 때문에 이 시기가 최악이다. 여름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날씨를 사랑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여름에게 애정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더워지는 게 고통스러웠다. 안 그래도 화가 많은 내게 너무 힘든 구간이다. 선선함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겨울잠을 자듯 여름잠을 잘 수만 있다면. 집에서 쉴 때는 그럭저럭 여름이 견딜만했다. 저녁 늦은 시간에 나가 산책을 하면 됐고 에어컨을 틀고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됐으니까.      


  일터는 시원했다. 하지만 자주 환기를 했기 때문에 에어컨 바람과 바깥의 더위가 만나 문 안쪽에서 상충했다. 땀을 닦으면서, 입고 온 슬랙스 끝 단을 허벅지 위로 접어 긴바지를 반바지로 만들면서. 인간적으로 너무 덥지 않나 싶다가 바깥의 가로수를 보고 저 친구들도 더울까 생각했다. 유난히 파릇한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는 버거운 온도가 저 나무에게는 적당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누구에게는 너무 뜨거운 것이 다른 이에게는 따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좀 차가운 듯하다가도 따뜻해지기도, 뜨거워지기도, 미지근해지기도 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니까. 누구나 각자의 온도가 있었다. 다른 온도가 만나면 한쪽은 필연적으로 녹거나 언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우면 서로를 망친다. 적정온도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된다. 나는 몇 명을 얼렸을까.     


  너 진짜 정 없다. 어우, 차가워. 내가 자주 듣는 말이었다. 쉽게 나의 연락처를 알리지 않고, 알리더라도 상대방의 이름을 저장할 때는 정자로 이름 세 글자를 쓴다. 성에 따라 정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인데, 대부분의 반응은 와 정 없어, 이다. 서운해하는 사람들은 성을 빼고 이름만 적어두고, 그 이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저장을 한다. 별명이 좋다면 별명을,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다면 그것을. 하지만 그런 이름들은 잘 찾게 되지 않았고 저장의 기본 양식은 이름 세 글자였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저장한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상처받았던 일은 아직 없다. 텍스트로 대화할 때도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주의해 있는 그대로 답장을 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해? 였다. 조금 둥글게 말해주면 안 돼? 심란해진다.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대충 대답하지도 않았다. 

  내가 가진 모습이 별로라는 피드백을 받으면 고치려고 노력했다. 쉽지 않더라도 해내려 했다. 하지만 바꿀 때마다 또 다른 의견들이 있었고 매번 내 온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엔 내가 아는 내 모습과 너무나 멀어진 채였다.     

 

  늘 그런 상태였다. 열이 나는 게 싫어 자꾸만 온도를 낮추려고 했다.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출근을 해서는 더욱 예민했다.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리하면 되고, 닦을 수 있는 것은 닦으면 됐다. 몇 개월째 먼지가 소복한 틈새를 아무도 닦지 않아 내가 닦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내가 했다. 바쁘지 않을 땐 서로 얘기도 하고, 쉬고 싶었던 사람은 그게 거슬렸을 것이다. 그럴 때 내게 말하는 것이다. 왜 열심히 하는 척 해? 

  나는 척을 하고 있구나. 혼란스러웠다. 이름 세 글자로 저장해 두는 건 차가운 것이고, 눈에 보이는 먼지를 닦는 건 열심히 하는 척을 하는 것이고. 때로는 사람들과 섞이려고 보이는 것들을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 비참해졌다. 그래, 그런 거 하지 마, 대충 해도 돼. 라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가져온 태도와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그래도 살아가는 이상 열심히 노력하고 발전하고 싶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잘하고 싶어서. 그게 내 전부였다. 잘하고 싶은 마음. 그것마저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두려웠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그런가 보다 했던 이유는,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싫다고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니가 맞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는 엄마 딸이다. 그렇게 자라왔다. 그게 내 삶이 됐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대체 누가 틀렸던 걸까. 엄마가 틀렸거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틀렸다는 건데. 그게 싫어서 내가 줏대 없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애초에 내가 나를 잘 알았더라면. 내 심지가 굳건했다면.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눈치가 빨라 알아서 했더라면.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다 내 잘못이었다.     


  환기를 끝내고 문을 닫으면 실내가 조금 차가워진다. 접었던 슬랙스를 내리고 땀이 식기를 기다렸다. 적당한 온도가 되어서 살만하다 싶을 때 뒤에서 춥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맞는 온도였으나 누군가에게는 추울 수 있다. 내가 조금 참으면 되니까, 에어컨 온도를 높이려 일어났다. 그때, 춥다고 말한 동료가 겉옷을 꺼내 걸쳤다.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먹었다. 일터 밖으로 나와 식당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더위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이런 날엔 서로 조심해야 한다. 불쾌지수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별 거 아닌 일로도 짜증이 나니까. 국물을 먹으면 더 더워졌기 때문에 찬 것을 주로 먹게 되었다. 나는 찬 음식이 싫다. 이래서 여름이 싫다. 다 싫어하는 것뿐이다. 더워서 입맛도 없고, 땀이 나고, 지친다. 열기는 언제나 내 기운을 뺏어갔다.     


  늘 앉아 쉬는 로데오 거리 벤치에서 담배를 피웠다. 풍성하게 뻗은 나무가 만드는 그늘 아래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완전한 여름이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또 훌쩍 지나 8월이었다. 월급날이 한 번 지나갔고, 반팔이어도 두께가 있는 것은 못 입을 날씨가 됐다. 짧은 장마가 한 번 지나가면서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날이 더워지는 만큼 해가 갈수록 매미도 시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점점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 위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하지만 그게 매미의 일이다. 여름 내 우는 것.


  계절마다 시간마다 그때만 듣고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여름이 아니면 뙤약볕 아래 매미 울음을 들을 수 없다. 파릇한 풀이 풍성하게 자라나 하늘 구석을 가리는 계절, 해가 길어져 마냥 일만 해도 오랫동안 낮인 계절, 담뱃불이 유난히 뜨거운 계절, 열기에 숨이 막히면서도 뜨겁게 걷다 보면 탁 하고 숨이 트이는 계절. 내가 조금 뜨거워지더라도 그 온도에 스며들 수 있는, 적당해지려면 꼭 필요한 화(火).     

  살랑 바람이 불었다. 땀이 식었다. 그래, 여름 속에는 그늘의 서늘함과 바람이 있었다. 그것까지가 여름이었다. 너무 뜨거워진다 싶으면 장마가 찾아와 바닥을 식혀준다. 비는 반드시 그친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결국 해는 뜬다. 그래서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오고. 내가 사는 세계는 뜨거워졌다가 식은 뒤 차가워지고, 따뜻해졌다가 다시 뜨거워지기를 반복한다. 그 커다란 순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평범함 속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날들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면 해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없고, 충분히 뜨겁지 않으면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 수 없다. 이별하지 않으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 수 없고, 만나지 않으면 이별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알 수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노력하던 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잊게 된다.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잊게 된다. 몇 년간 내 세계에는 여름이 없었다. 또한 가을도, 겨울도, 봄도 없었다. 실온에 보관되어 있다 바깥으로 나온 지금에야 내 온도를 알 것 같았다.      


  담배를 버리고 일터로 돌아갔다. 양치를 하고 손을 씻은 뒤 자리에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겉옷을 걸친 동료와 반팔을 걷어 민소매를 만든 내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을 했다. 여러 온도가 뒤섞여 있었고 모든 게 모여 하나의 따뜻함이 됐다. 뜨겁지 않은 여름을 보내는 일이 낯설었으나 즐기고 싶었다.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은 시련이나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 조화로운 것이었다. 다만 지나가는 여름처럼, 다가오는 가을처럼.     


  어릴 땐 계절이 흘러가는 모습을 몰랐다. 어느새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게 변해가는 흐름이 선명하다. 그 속에 나를 세워두고 다 지나가기를 바랐다. 이런 게 일상이구나. 모두가 사는 세상이고, 내가 될 수 있는 일부구나. 휴일에 동네를 걷다 햇빛 가림막 아래 있는 벤치에 앉았다. 통장에는 생활비가 넉넉했고, 햇볕은 뜨거웠고, 바람이 조금 불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었고,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가 귀여워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과 둘이서 전동 킥보드를 타고 가는 학생들, 느린 속도로 좌회전을 하는 운전면허 학원의 노란 승용차,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공사 현장의 레미콘 트럭. 평화로웠다. 그럼 이제 성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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