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달빛〉 —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by 마음뚠뚠

어떤 밤은
감정이 많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말,
늦게 도착한 후회,
괜히 예민해진 마음.

그럴 때는 쇼팽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감정이 한 차례 지나간 뒤의 밤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충분히 느낀 다음,
이제는 더 붙잡지 않아도 될 때.


그때 저는
클로드 드뷔시의
〈Clair de Lune〉를 틉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u9s89C-pc&list=RDCfu9s89C-pc&start_radio=1

[ 영화 오션스 일레븐 ]


오션스 일레븐의 마지막 분수 장면에서 나오는 이곡이

드뷔시의 달빛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분수 앞에서 멤버들이 하나씩 흩어지는 그 장면.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이룬 엄청난 성공

큰 환희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닌

차분히 지나가는 고요함.


실제로는 메인 테마를 변주한 사운드트랙이지만,

달빛으로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 장면의 여백은 달빛의 호흡과 닮아 있어

고요함 속에 느껴지는 밤의 여백과

여러 배우들의 표정이 색다른 느낌을 줬던 기억이 납니다.



달빛이라는 제목은
이 곡을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빛이지만
밝히려 하지 않는 빛.
드러내지만
규정하지 않는 빛.


이 음악에는
서사가 없습니다.
갈등도 없고,
결론도 없습니다.


다만
흐르는 결이 있을 뿐입니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저는 이 음악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달빛은
낮의 태양처럼 사물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대신 윤곽만 남깁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끝내 완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 완전하지 않음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완전히 해결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자리에 두어도 괜찮은 상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프랑스의 작곡가로, 인상주의 음악의 상징 같은 인물입니다.

전통적인 화성 규칙에서 벗어나 빛·물·공기 같은 분위기를 소리로 표현하는 작곡가죠.

그가 43세 되는 1905년에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제3곡에 있는

그의 최고 대표곡입니다.


〈달빛〉


당신의 영혼은 선택된 하나의 풍경이고

그 안을 매혹적인 가면들과 베르가마스크 차림의 사람들이 오가며

류트를 연주하고 춤추며, 그리고 거의

기괴한 변장 아래에서 슬퍼 보인다.


모두 단조로 노래하면서

승리한 사랑과 알맞은 인생을 노래하지만

그들 자신들의 행복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그들의 노래는 달빛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고요한 달빛 아래에서

나무속의 새들은 꿈꾸게 되고

분수의 물줄기들은 황홀 속에서 흐느끼며

산책로의 큰 대리석 조각들은 떨린다.



폴 베를렌의 시가 이곡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프랑스어의 느낌을 다 알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연주와 함께 듣다 보면

겉은 아름다운데 속은 쓸쓸하고,

슬픔을 노래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모호하고,

피아노 페달의 느낌이 가면과 진짜 얼굴을 왔다 갔다 하고,

박자의 늘어남이 말없이 지나가는 시간처럼 느껴지고,

결론은 하나도 없고 그냥 소리만 사라져

결국 '아, 다 지나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계속 가지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7_VJve7UVc&list=RD97_VJve7UVc&start_radio=1


조성진의 달빛은
구조가 선명합니다.
소리는 번지지 않고
정확한 자리에서 멈춥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빛이 사물을 흐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윤곽을 더 또렷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복잡할 때
그의 달빛을 듣습니다.

감정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선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소 거칠어진 생각과 헝클어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조금 떨어져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0Iyws-M8pg&list=RDy0Iyws-M8pg&start_radio=1


손열음의 달빛은
조금 더 유연합니다.
여백이 살아 있고,
한 악절의 끝이 완전히 닫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연주에서는
빛이 조금 더 따뜻합니다.
차갑지 않고,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달빛 아래 서 있으면
혼자라는 느낌이
조금 덜합니다.



드뷔시는
감정을 없애지 않습니다.
다만
덜어냅니다.


과장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차분하게 던져주는

그의 마음이

살포시 내려앉게

모두 기다리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일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을 내리고,
의미를 붙이고,
설명할 수 있고

잘 전달되어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덜 분명해도 괜찮습니다.


달빛 아래에서는
사물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밤은 충분합니다.


오늘은
감정을 조금 덜어내는 쪽을 선택합니다.
완전히 비우지 않고,
완전히 채우지 않고.


그 사이에
조용히 머물러 봅니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