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딘 <이고르 왕자> - 끝나지 않는 공연

Amazing Digtal Circus 그림 : 9k.gn(인스타)

by 마음뚠뚠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는
처음부터 숨이 가쁩니다.


색은 과도하고,
움직임은 빠르고,
웃음은 부자연스럽습니다.


그곳은 한 번 들어오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


이름은 지워지고,
역할만 남습니다.


계속 연기해야 하고,
계속 웃어야 하고,
계속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 세계에서
사무실 장면은
시스템의 심장부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탈출할 뻔한 그 찰나에
울려 퍼지는 음악.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왕자.


https://www.youtube.com/watch?v=zPDrJaUCp8s&list=RDzPDrJaUCp8s&start_radio=1



첫 음이 터지는 순간
공기가 갈라집니다.

닫혀 있던 공간이
순간적으로 밀려 올라갑니다.


디지털 서커스의 인공적인 천장이
갑자기 하늘처럼 느껴집니다.


그 음악은
단순히 웅장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음악 특유의 감정은
차갑지만 뜨겁습니다.

광활한 설원 위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의지.

울컥한 마음이지만 입은 웃고 있는 그런.


테마가 반복 연주되면
가슴이 먼저 반응합니다.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구조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먼저 벽을 넘어갑니다.


보로딘의 선율은
닫힌 방을 평원으로 바꿉니다.
밀폐된 시스템을
지평선으로 확장합니다.


그 순간
디지털 서커스의 세계는
완벽하지 않게 흔들립니다.


탈출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은
이미 다른 차원의 승리였습니다.


알렉산드로 보로딘 (1833 ~ 1887)은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지만,

알데히드나 벤젠을 연구한 화학자로

일요일의 작곡가라는 이름을 가질 정도로

전업 작곡가는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이 이고르 왕자 오페라는

20년 정도 작업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5인방 동료들의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화학계, 여성운동, 의학등

여러 장르에서 활동했지만

의사들이 참석하는 무도회에서

저와 비슷한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음악마저도

다른 생활의 연장이었을까요?

아니면 벗어나지 못하는 빡빡한 일상에서

본인을 지키는 샛별 같은 존재였을까요?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에서

시스템은 어른이 된다는 건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일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라고

자꾸 자각하게 만듭니다.


빛나지만 튀는 나만의 가능성을 하나씩 접어 가고,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고,

탈출대신 적응을 선택해 최대한 덜 아프게 살아가고,

나답게 살기보다는 더 망가지지만 말자라는,


어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린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괜찮은 척이 능숙해지는 것이라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iexn6O9To4&list=RDwiexn6O9To4&start_radio=1



『이고르 왕자』는
도망치는 음악이 아닙니다.

버티는 음악입니다.


왕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싸우고, 흔들리고,
그래도 서 있습니다.


그 벅찬 러시아적 감정은
눈물로 흐르지 않습니다.

가슴 안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숨이 깊어지고,
시야가 넓어지고,
순간적으로 자신이 더 커지는 느낌.


탈출 직전의 심장 박동처럼
음악이 맥박을 밀어 올립니다.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닮았습니다.


역할은 벗기 어렵고,
구조는 단단하고,
공연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서커스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가끔
어떤 음악이
우리를 먼저 밖으로 데려갑니다.


보로딘의 『이고르 왕자』가
그 장면에서 울릴 때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완전히 갇힌 존재는 아니라는 것.


구조 속에 있어도
의지는 아직 남아 있다는 것.


탈출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가고 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언제인지는 모르진만 나갈 때까지

곁에 있는 사람들끼리 먼저 보살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그 벅찬 선율이
가슴을 밀어 올리는 순간,
탈출은 현실이 아니라도
이미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공연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 음악을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우리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닫힌 공간에서도
광활한 평원을 상상할 수 있고,
무대 위에서도
하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탈출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가슴이 먼저 나간 순간.


그 벅참이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실하게 버티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0j4Xf5R2v8&list=RDv0j4Xf5R2v8&start_radio=1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