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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Sep 06. 2020

첫째의 첫 입학 날

이제 나는 학부형입니다

9월 3일 입학 날짜가 통보가 되었다. 프랑스는 초등학교 입학 전 유치원 과정 (L'école maternelle)으로 3살 된 아이들이 학교를 간다. 이 과정은 총 3단계로 나뉘는데, 'PS (Petit section) - 작은 반' 'MS (Moyenne section) - 중간반' 그리고 'GS(Grande section) - 큰 반'이다. 이 과정은 초등학교 입학 전 공부를 한다기보다 여러 액티비티를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세계를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으로 학업을 재미있게 배우기 위한 단계이다.  



9월 3일, 첫날은 맛보기 겸 아이들이 부모 없이 2시간 정도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부모들도 9시 반에 아이들을 맡기고 하나둘씩 학교를 나가고 12시 점심 먹기 전에 아이들을 찾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 말로는 서럽게 우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아들도 그들 중 하나였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 약한 남편이 제일 뒤늦게 반을 빠져나왔다고..

유모에게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 가야 - 같은 반이 돼서 다행이야!!



둘째 날부터는 풀데이 코스였는데, 아침 8시 50분에 등교해서 오후 4시 반에 찾으러 가면 되는 것이었다. (부모 상황에 따라 오전 12시나 오후 6시에 찾으러 갈 수도 있다.) 처음으로 본인이 화장실도 가야 되고 밥도 학교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먹고 낮잠도 자야 되는 것이라 부모인 나도 다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반에 29명의 학생이 있으니 선생님이 한 명 한 명 다 케어를 해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한 반에 선생님 한 명 그리고 도움 교사 한 명 이렇게 2명이 배치된다. 그래서 많은 프랑스 부모들이 9월 개학 전, 8월 바캉스 기간에 아이들 화장실 교육을 엄청 빡시게 시킨다. 

첫째는 좀 늦된 편이라 3살이 거의 넘어서 기저귀를 뗐는데 적응은 바로 한 편이었다. 문제는 학교에서는 화장실 뒤처리도 혼자 해야 되는 것이라 지퍼, 단추 이렇게 아이들이 혼자 입기 힘든 옷은 아예 입혀 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학교 통보에서 혹여나 옷에 지저분한 것이 묻어 오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한마디 - 그것이 먹고 남은 자국이 되었든 화장실 갔다 온 흔적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얼마 전 읽은 기사 내용이 한국에서 보육 교사가 아이의 똥 뭍은 바지를 씻어 보내지 않았다고 부모가 그 보육원을 고소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프랑스)는 똥 뭍은 팬티, 이런 것은 아주 보통인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들 옷차림이 다 조깅 바지에 단순한 티셔츠에, 너풀 너풀 공주 의상은 꿈꿀 수도 없다. 한국 엄마로서 다소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다 아이들이 처음 혼자 해본다는 것에 의미가 있긴 해도 그래 봐야 3살인데 싶었다. 




조마조마 첫날을 보내고 둘째를 둘러업고 학교를 갔더니 아들은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울먹울먹이다. 비단 우리 아들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그랬다. 문 앞에서 아주 눈물겨운 모자 상봉 광경이 벌이 졌다. 혼자 바지를 올렸는지 들어가다만 티셔츠랑 울다만 흔적이 역력한 아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아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게 좀 늦은 편인데 한 주만이라도 오전에 바로 찾으러 갈까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아이마다 성향이 다른데 처음부터 너무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컸다. 그런데 남편은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과정을 겪는다며 차차 적응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너무 애워싸서 키우는 건지 남편이 너무 강경한 건지 - 여하튼 나에게 (한 것은 없는데) 너무 긴 하루였다. 


14개월 동안 첫째를 혼자 키우다가 직장에 취직이 되어 유모에게 처음 맡겼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홀로 단손에 키운다고 힘은 들었어도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말도 조금씩 시작할 때라 육아의 재미가 붙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 식구가 늘었으니 돈도 벌기 시작해야 되고 무엇보다 내 삶을 다시 찾긴 해야 했다. 언제까지 누구 엄마로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허다한 이론은 빠삭한데 막상 실천을 하자니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 뛰었다. 누구라도 '저 어린것을 네가 키워야 되지 않겠니' 했다면 나는 바로 사표를 던질 판이었다. 사표만 외투에 안 넣고 다닐 뿐이었지 마음만은 언제든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샘에 핀 하나만 톡 찌르면 눈물이 쏟아질 판이었다. 그렇게 멘탈이 흔들흔들한 채로 한 달이 갔다. 법정스님이 3년은 엄마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다 '돈이야 나중에 벌면 되고 마이너스 통장을 쓰더라도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 그럼 나는 반쪽자리 엄마인가.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사표를 던지지 못하고 직장맘으로 남았지만 그때의 기억이랄까 감정의 오르내림의 여운은 마음속에 남아있다. 잘했다 못했다 여부를 떠나서 나는 그때 상황에 최선의 선택을 했다. -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믿는다.

아들은 적응을 잘할 거다. 

그리고 하나하나 사회를 알아갈 거다. 

언제까지 품속에 자식으로만 클 수도 없다. 

날개를 달아 주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 역할이니까. 

다만, 좀 어리숙하고 새로운 것이 익숙지 않은 아들의 성향에 맡게 속도 조절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누군가 아이들은 하얀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로 색이 입혀지는 것이라고. 지금 우리 아들도 그 밑그림에 하나하나 색이 더해지는 중이다. 


아마도 이런 다양한 멘붕의 경험은 첫째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거다. 그렇다고 둘째가 주는 감동이나 그를 통해 겪는 경험이 적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 하나에서 다소 좀 수월한 게 있다. 둘째 때에는 그래도 사표를 외투에 꼽고 댕긴다던지 뭐 그런 말은 안 하겠지. 이 모든 게 다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내일 또 한주가 시작한다. 기압을 넣고 - 마음을 굳게 먹고.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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